"정책 결정 당부는 정치 영역"…감사원, 정책감사 접고 회계검사·직무감찰로 선회
정책결정 책임을 둘러싼 공방과 감사원의 역할을 두고 정치권과 행정부 사이 긴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감사원이 정책감사를 사실상 접고 회계검사와 직무감찰에 집중하겠다는 새로운 방향을 내놨다. 감사원이 스스로 견제 강도를 조정하면서 향후 정부 정책 감시 체계와 국회 요구 사이에서 또 다른 논쟁이 예상된다.
감사원은 17일 감사사무 처리 규칙을 개정해 감사 범위를 재조정했다고 밝혔다. 핵심은 그간 유지해온 정책감사 틀을 폐지하고, 정책 결정과 연관된 사안에 대해서는 불법·부패 행위에 대한 직무감찰과 회계검사에 집중하겠다는 점이다.

감사원은 지난 8월 공직사회 활력 제고를 명분으로 정책감사 폐지 방향을 처음 제시했다. 이후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달 "올해 감사 사무처리 규칙을 개정하고, 내년 상반기 감사원법을 개정해 정책감사 폐지를 제도화하겠다"고 밝히면서 제도 정비를 예고한 바 있다. 이날 규칙 개정은 그 연장선에 놓인 조치다.
종전 규칙은 감사 대상에서 정부의 중요 정책결정과 정책목적의 당부를 제외하면서도, 해당 결정의 근거가 된 사실 판단, 자료·정보 오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적정성, 정책 결정의 적법성과 절차 준수 여부 등은 감사 대상으로 폭넓게 설정했다. 정책 당부 판단은 피하면서도 결정 과정 전반을 점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개정 규칙은 감사 가능 대상을 정책 결정과 관련된 불법·부패 행위에 대한 직무감찰로 축소했다. 동시에 정부의 중요 정책결정의 당부를 감사 제외 대상으로 보다 명확히 규정했다. 정책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은 감사원이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감사원은 앞으로 국회 감사요구나 국민감사 청구 등 외부 요구에 따라 정책결정 사안에 대한 감사가 불가피한 경우에도 해당 사안을 둘러싼 회계검사와 직무감찰 부분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입장이다. 정책적 판단 자체를 문제 삼는 대신, 예산 집행의 적정성, 관련 공무원의 위법·부당 행위 여부 등으로 범위를 한정하겠다는 것이다.
감사원 관계자는 "정책 결정의 당부는 행정보다 정치의 영역"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집행 등 이외 부분은 전과 같이 감사할 것"이라며 정책의 준비, 설계, 집행, 평가 단계에서의 행정 운영 전반은 계속 점검하겠다고 설명했다.
감사원은 특히 앞으로 감사가 정책적 잘잘못을 따지는 절차로 비치지 않도록 객관적 경위와 사실관계 확인 등 정보 제공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다만 "고의성이 있는 사익 추구 및 특혜 제공 등 불법·부패 행위는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밝혀, 위법 행위에 대한 제재 의지는 유지했다.
자체 계획감사의 경우 정책의 결정 자체를 제외한 준비·설계, 집행, 평가를 중심으로 진행하겠다는 방침도 제시했다. 감사원은 이를 감사원법에 규정된 행정 운영의 개선과 향상이라는 목적에 맞추겠다고 설명했다. 정책결정 사안 가운데서도 사회적 현안으로 부각돼 불법·부패 정황이 상당한 경우에는 감사를 신중히 검토한다는 단서도 달았다.
이날 감사원은 인공지능디지털교과서 도입과 관련한 감사 결과를 함께 발표하면서, 해당 감사도 사실관계 규명에 방점을 찍었다고 강조했다. 정책 도입의 옳고 그름보다는 추진 과정에서의 절차와 사실관계 정리에 무게를 뒀다는 설명이다.
감사원의 이런 방향 전환에는 공직사회 위축 우려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감사원 관계자는 "공직사회가 위축되지 않도록 책임 추궁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라며 "앞으로 불법 행위를 발견해 개인에 책임을 묻기 위한 과도한 인력·시간 투입이나 포렌식 조사는 자제하겠다"고 밝혔다. 강도 높은 디지털 포렌식 조사 등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활용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다만 감사원의 정책 견제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감사원 관계자는 "불법·부패행위가 언론 등을 통해 발견된 사안에 대해선 정책 관련 감사를 한다"며 "천문학적 돈 낭비 사례의 경우도 정책 집행 과정 감사에서 적발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책의 방향성보다는 집행 과정의 위법·부당 여부를 중심으로 견제 역할을 이어가겠다는 취지다.
감사원은 개정된 감사사무 처리 규칙의 내용을 내년 상반기 감사원법 개정에도 반영할 계획이다. 감사원은 "공직사회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며, 제도 개편을 통해 적극행정을 뒷받침하겠다고 설명했다.
한편 감사원이 감사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주요 현안의 처리 상황도 일부 소개했다. 감사원은 대왕고래로 불리는 동해 심해 가스전 사업 관련 감사에 관해 "내부 검토는 이뤄졌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또 무안공항 참사와 관련해선 항공안전실태 감사를 진행해 조만간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향후 감사원법 개정 논의와 맞물려 감사원의 역할과 정치적 중립성을 둘러싼 공방은 계속될 전망이다. 국회는 관련 법 개정 과정에서 정책 견제 기능과 공직사회 위축 방지 사이의 균형을 두고 치열한 논의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