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가 더 내리라고"…제약업계, R&D 위축 우려 커진다
정부의 약가제도 개편을 앞두고 제약바이오 업계가 집단 대응에 나섰다. 신약 개발과 바이오 의약품 경쟁이 글로벌 차원에서 격화되는 시점에 추가 약가 인하가 현실화될 경우, 국내 산업의 연구개발 투자 여력과 제조 기반이 동시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업계는 이번 논의가 단순한 가격 조정이 아니라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의 성장 전략과 직결된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27일 산업 발전을 위한 약가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 1차 회의를 열고, 조만간 발표가 예상되는 정부 약가제도 개편안의 산업적 파장을 점검했다. 이번 비상대책위 출범은 정부 공식안을 기다리기보다, 사전에 업계 의견을 정리해 제도 설계 과정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비상대책위에는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을 비롯해 류형선 한국의약품수출협회 회장, 김정진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이사장, 조용준 한국제약협동조합 이사장 등 주요 단체 수장이 공동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참여했다. 산하에는 기획정책위원회와 국민소통위원회가 실무를 맡고, 협회와 회원사 임원들로 구성된 실무지원단이 가동에 들어갔다. 국내 제약사, 바이오벤처, 수출 중심 기업, 연구조합, 협동조합까지 포괄하는 연합 전선이 형성된 셈이다.
비상대책위는 이날 회의에서 아직 정부의 약가제도 개편안이 정식 공개되지 않은 점을 감안해, 지금까지 알려진 윤곽을 토대로 예상 영향을 분석했다. 특히 약가 인하 폭과 적용 대상, 신약 및 개량신약에 대한 보상 구조 변경 여부가 산업에 미칠 후폭풍을 집중 점검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는 제약바이오 강국 도약의 골든타임에 추가 약가 인하가 시행될 경우, 신약 후보물질 발굴과 임상시험에 투입할 수 있는 재원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신약 개발은 통상 10년 이상, 수천억 원대 비용이 소요되는 고위험 장기 투자 구조를 갖는다. 약가가 반복적으로 인하되면 매출 기반이 약해지고, 결과적으로 R&D 투자 여력도 줄어드는 구조적 제약이 심화된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핵심 우려는 제조 인프라와 보건안보 리스크다. 국내 생산 의약품에 대한 가격 통제가 강화될 경우, 다국적 제약사의 고가 수입 의약품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부 필수의약품이나 원료의약품 생산이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축소되면 공급망 불안이 커지고, 위기 상황에서 자국 내 생산기반 부족이 보건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글로벌 시장에서는 희귀질환 치료제, 면역항암제, 세포유전자치료제 등 고부가가치 분야를 중심으로 기술 경쟁이 치열하다. 국내 기업들이 이 영역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임상 시험 확대와 생산시설 고도화, 인력 양성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동반돼야 한다. 업계는 약가 인하 기조가 유지될 경우, 국내 기업은 수익성 악화로 투자 여력이 떨어지고, 글로벌 빅파마 중심의 기술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비상대책위에 참여한 단체들은 약가제도 개편의 취지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산업 경쟁력과 환자 접근성을 동시에 고려한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혁신 신약과 제네릭 의약품, 필수의약품 등 각 카테고리별로 차등적인 가격·보상 구조를 도입해, 연구개발 유인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상대책위는 정부를 상대로 제약바이오 산업의 장기 성장 전략과 연동된 약가정책을 제안하고, 개편 과정에서 산업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구체 대응 방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위원회는 정부에 합리적 의견을 전달하고, 산업계의 현실을 반영한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제약바이오 업계와 정부 간 약가제도 개편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혁신 유인과 재정 건전성, 환자 접근성과 산업 경쟁력 간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에 시선이 쏠린다. 산업계는 이번 개편이 국내 제약바이오의 도약 발판이 될지, 성장 동력을 둔화시키는 변곡점이 될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