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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명 처방 의무화 논쟁”…의협 여론조사에 7할 “의사 처방약 선호”

오예린 기자
입력

성분명 처방 의무화가 의약품 수급 불안정 대응책으로 추진되는 가운데, 다수 국민은 제도 내용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의사가 처방한 약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와 국회가 필수의약품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의사 처방전의 약 이름 대신 성분명을 표기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편에 나선 상황에서, 실제 의료 소비자인 국민의 인식과 제도 추진 속도 간 괴리가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사 결과가 의약품 선택 책임과 약화 사고 시 법적 책임 구조를 재정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범의료계 국민건강보호 대책특별위원회는 27일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분명 처방 관련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는 대한의사협회가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1007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성분명 처방 법안 인식, 약사의 대체조제와 고지 의무 이해도, 약화 사고 시 법적 책임 인식, 의약품 선택 선호도, 의약분업 선택제에 대한 의견 등을 폭넓게 물어 의료 현장과 정책이 만나는 접점을 점검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성분명 처방 법안에 대한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4.5퍼센트는 성분명 처방 법안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15.4퍼센트에 그쳤고, 일부 들어본 적이 있다는 응답까지 포함하더라도 제도 세부 구조와 영향까지 이해하는 층은 제한적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의약품 공급 불안 시 처방전 표기 방식을 성분 기준으로 전환한다는 정책 취지가 일반 국민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셈이다.

 

성분명 처방은 특정 회사 제품명이 아닌 유효 성분 이름으로 처방전을 쓰도록 하는 방식이다. 정부와 여당은 필수의약품을 포함한 수급 불안정 의약품에 한해 성분명 처방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공급 차질이 발생해도 동일 성분의 다른 제약사 제품으로 신속히 대체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 품절 사태 때 환자 치료 공백을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처방의와 약사 가운데 누가 약 선택의 실질적 주체가 되는지, 약효나 부작용 차이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정교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현행법상 약사가 의사의 처방약을 동일 성분의 다른 제품으로 바꾸는 대체조제 제도에 대한 인지도도 제한적이었다. 제도를 알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60.6퍼센트였지만, 세부 규정까지 정확히 숙지하고 있는 상세 인지층은 대체조제 17.5퍼센트, 대체조제 고지 의무 22.7퍼센트에 머물렀다. 실제 현장에서는 약사가 가격, 제약사, 제형 등을 고려해 동일 성분의 다른 약으로 바꾸는 경우가 있지만, 환자 상당수는 이를 제도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이해하기보다 개별 약국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양상으로 분석된다.

 

약화 사고나 부작용 발생 시 법적 책임 구조에 대한 인식은 더 낮았다. 응답자의 57.1퍼센트는 약사가 의사 처방약을 다른 약으로 대체조제한 뒤 부작용이 생겨도 의사에게는 법적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약 선택 권한이 성분명 처방을 계기로 약사 쪽으로 더 실질적으로 이동하게 되면, 법적 책임 주체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수라고 지적한다. 성분명 처방 제도가 정착되면 의사는 성분을, 약사는 구체적인 품목과 제약사 제품을 결정하는 구조가 강화되기 때문에, 환자 관점에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위험도 제기되고 있다.

 

의약품 선택 선호도 조사에서 국민 다수는 여전히 의사 처방을 더 신뢰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약값 차이를 배제하고 물었을 때 응답자의 70.2퍼센트가 의사가 구체적으로 지정한 약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반면 약사가 대체조제한 약을 선호한다는 응답은 7.3퍼센트에 그쳤다. 약학적 동등성과 생물학적 동등성 평가를 거친 제네릭 의약품이 품질과 효과 면에서 오리지널 약과 동등하다고 보는 것이 글로벌 규제기관의 기본 입장이지만, 실제 소비자 인식에서는 처방의의 판단과 개별 제품 지정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경향이 뚜렷하게 확인된 셈이다.

 

감염병 대유행이나 특정 약 품절 사태 같은 위기 상황에서의 조제 방식에 대해 국민은 원내 조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사 결과 70퍼센트가 의사가 진료한 의료기관 안에서 직접 약을 조제해 주는 원내 조제에 찬성했다. 현재 한국의 의약분업 체계는 병원과 약국을 분리해 의사는 처방만, 약사는 조제와 복약지도를 담당하는 구조다. 다만 위기 상황에서 병원 내 조제를 허용하면 환자의 이동 동선을 줄이고, 감염 확산이나 약 수급 혼선을 줄일 수 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더 나아가 의약분업 자체를 선택제로 전환하자는 주장에도 공감대가 적지 않았다. 환자가 병원 조제와 약국 조제 가운데 원하는 방식을 고를 수 있도록 하자는 의약분업 선택제에 대해 응답자의 74.2퍼센트가 찬성 의사를 밝혔다. 의료계는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근거로, 지난 25년 동안 유지돼 온 일률적 분업 체계를 재평가하고 환자 선택권을 넓히는 방향의 제도 개편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약사 단체는 의약분업이 약물 오남용 감소와 약 안전성 관리를 위해 구축된 기본 틀이기 때문에, 선택제 도입이 약물 관리 체계에 혼선을 주고 의료비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해왔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번 조사를 통해 성분명 처방과 의약분업 관련 논쟁이 국민 인식과 얼마나 괴리돼 있는지를 드러냈다고 강조했다. 의협은 앞으로도 객관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부 및 국회와 적극 소통해 국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이 마련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의료계는 특히 성분명 처방이 의약품 선택의 주체를 실질적으로 바꾸는 중요한 제도 변화임에도, 약화 사고 발생 시 책임 구조나 장기적 국민 건강 영향에 대한 검토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황규석 범대위 홍보위원장은 국회에서 의약품 수급 불안정 사태를 계기로 성분명 처방 도입을 강제하는 법안이 발의되고 있지만, 의료계와 국민 합의가 선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황 위원장은 의약분업 시행 25년 동안 국민이 병원과 약국을 오가며 이중 비용을 부담하는 불편을 감수해 왔음에도, 제도가 국민 건강에 실제로 어떤 효과를 냈는지에 대한 종합 평가 없이 분업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의료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행 제도와 성분명 처방에 대한 국민의 정확한 이해와 선호를 보여주는 객관적 데이터가 부족해 이번 조사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정책 측면에서는 성분명 처방이 의약품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정부의 판단과, 책임 구조와 환자 신뢰를 중시하는 의료계 우려가 충돌하는 구도다. 해외에서는 성분명 처방과 제네릭 사용 확대가 보건재정 절감과 약품 공급 안정에 기여해 왔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국내에서는 제약사 간 품질 관리 편차, 환자와 의료진의 신뢰도, 약국 현장의 조제 관행 등 변수를 고려한 세밀한 설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의료계와 약계, 정부와 국회가 모두 다른 이해관계를 갖는 만큼, 성분명 처방 제도화는 단순한 처방전 표기 변경을 넘어 의약품 선택 권한, 데이터 기반 약물 감시 체계, 약화 사고 분쟁 조정 구조까지 연쇄적으로 손보는 작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산업계와 의료계에서는 국민 인식조사에서 드러난 신뢰 구조와 책임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지 못할 경우, 제도 자체의 정착 속도와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결국 성분명 처방과 의약분업 개편 논의는 의약품 수급 안정, 환자 안전, 의료비 구조, 산업 경쟁력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느냐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산업계와 정책당국은 이번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제도 설계와 홍보, 교육 전략을 정교하게 조정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오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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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사협회#성분명처방#대체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