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천년 시간을 걷다”…고령에서 만나는 역사와 평온
여행을 떠나는 기준이 달라졌다. 누군가는 찬란한 풍경보다 고요한 공기, 옛사람의 흔적이 머문 자리를 따라 걷는 경험을 택한다. 경북 고령, 흐린 하늘 아래 시간마저 느릿해진 이곳에서, 지나온 세월이 켜켜이 내려앉은 공간들을 만난다.
요즘은 역사와 일상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여행을 바라는 이들이 많다. ‘대가야의 시간’을 품은 고령에는 노란빛 들녘을 가르는 낙동강의 변화부터 천년 고분의 적막함까지, 다양한 표정이 담겨 있다. 대가야생활촌에서는 실제 고대인의 집, 생활도구, 놀이마당을 재현해 두어 어린이 가족 단위 방문객뿐만 아니라 혼자 조용히 사색을 즐기려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머문다. SNS에는 대가야 읍성을 배경 삼아 느릿하게 산책하거나, 재현된 고분에서 호기심 섞인 인증사진을 남기는 이들의 모습이 속속 올라온다.

이런 변화는 여행의 목적을 묻는 각종 설문에서도 드러난다.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최근 자료에 따르면 ‘역사·문화 체험형 여행’ 선호도가 30대 이하 젊은 층은 물론, 5060 세대에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그만큼 ‘과거로의 산책’이 세대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여행법으로 자리잡는 흐름이다.
고령의 상징 중 하나인 고아리벽화고분 역시 시간이 멈춘 듯한 풍광을 선물한다. 이곳은 대가야 지배층의 무덤 양식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오래된 돌담과 풀 한 포기에 담긴 옛 예술의 흔적에 감탄하는 이들이 많다. 한 방문자는 “회색 구름 너머로 쏟아진 옅은 햇살에 돌담이 금빛으로 빛났던 그 순간, 마치 그 시절의 사람들이 곁에 있는 듯했다”고 고백했다.
산사의 조용한 멈춤을 만날 수 있는 반룡사는 신라의 찬란한 세월부터 지금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다. 사찰 경내 문턱을 넘는 순간 도시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든다. 맑은 바람과 고요한 마루, 나지막한 목어 소리 사이에서 마음 한 끝이 느슨하게 풀린다. 한 여행 전문가는 “반룡사를 비롯해 고령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하루’를 누리기 위해 찾아온다”며 “그 속에서 내면의 평온을 얻거나, 뜻밖의 감정 정리를 경험하게 된다”고 전했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거창한 액티비티 대신, 이런 장소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 “박물관보다 실제 유적지에서 느끼는 감각이 훨씬 깊다” 등 일상의 틈에서 과거의 시간을 꺼내보려는 공감이 이어진다.
고령의 천년 골목과 고인돌, 산사와 생활촌. 소박하지만 오래된 흔적은 우리 일상의 속도를 잠시 잊게 한다. 여행이란, 어쩌면 지나온 시간의 그림자를 따라 내 삶을 천천히 돌아보는 길일지도 모른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