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군연계 엔진 로드맵”…우주청, 민수용 육성해 수출 도전
민수용 항공 엔진 기술이 국내 항공우주 산업의 구조 전환을 이끌 전략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군수 수요 중심에 머물렀던 항공 엔진 기술을 민수 시장까지 확장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고, 향후 글로벌 엔진 공급망에 진입하겠다는 구상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로드맵이 군 사용 목적의 단수명 엔진 위주에서, 민항기·비즈니스 제트·무인기 등 다양한 플랫폼을 겨냥한 고효율 장수명 엔진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우주항공청은 19일 서울 로얄호텔에서 차세대 민수용 항공 엔진 기술 로드맵 및 핵심 기술 개발 사업 추진 계획 공청회를 열고, 민수용 항공 엔진 산업 자립화와 글로벌 시장 진출을 목표로 하는 중장기 전략을 공개했다. 이번 로드맵은 지난해 우주항공청 개청 당시 제시된 우주항공 5대 강국 진입 전략의 후속 조치로, 항공 엔진 분야에서 구체적인 투자 방향과 기술 확보 단계가 처음 제도권에 제시된 셈이다.

현재 국내 항공 엔진 산업은 방위 사업 중심의 기술 도입 생산 구조에 제한돼 있다. 해외 완제품 엔진을 들여와 정비·면허 생산을 수행하고, 정밀 가공 부품 일부를 국산화하는 수준에 머무르며 설계·체계 통합 역량이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다. 독자 개발 엔진도 유도무기용 단수명 소모성 엔진 등 특수 군용으로 한정돼, 장수명·고신뢰 민수 엔진과는 기술 스펙트럼이 달라 글로벌 민항 시장 진입에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했다는 평가가 반복돼 왔다.
우주항공청이 공개한 기술 로드맵의 핵심은 군용에서 검증된 엔진 기술을 민수용으로 파생시키는 민군 연계 모델이다. 고온·고압 환경에서 작동하며 추진력을 내는 가스터빈 기반 항공 엔진 기술을 군용 고기동기에서 민항기용 고효율·저소음 플랫폼으로 전환하면서, Lifecycle 비용을 줄이고 다수 기체 플랫폼에 동시에 적용해 시장성을 확보하겠다는 방식이다. 특히 군용 설계 데이터와 시험 데이터는 민수용 설계 검증과 감항인증 과정에서 신뢰성 입증 자료로 활용될 수 있어, 개발 기간 단축과 비용 절감 효과가 기대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드맵의 상징 사업으로 제시된 4500파운드급 고바이패스 터보팬 원형 개발 프로젝트는 이러한 전략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첫 시험대다. 고바이패스 터보팬은 팬을 통과하는 공기량을 크게 늘려 연료 효율과 소음을 동시에 개선하는 기술 구조를 뜻한다. 우주항공청은 이 출력대의 엔진을 소형 민항기, 고급 비즈니스 제트, 중대형 무인 항공기 등에 맞출 수 있는 플랫폼으로 설계해, 국내 항공기 개발 사업과 연계하고 수출용 기체 시장에도 대응할 수 있는 기초 기술로 삼겠다는 방침이다. 해당 사업은 2026년 신규 사업으로 이미 기획돼 현재 국회 예산 심의 단계에 올라 있다.
기술 로드맵에는 엔진 원형 개발뿐 아니라, 엔진을 실제 상용 시장에 투입하기 위해 필요한 주변 기술도 포괄됐다. 우주항공청이 제시한 차세대 민수용 항공 엔진 핵심 기술 개발 사업 안은 다섯 개 전략 과제로 구성된다. 첫째, 민수용 항공 엔진 자체의 원형 개발을 통해 국산 설계·해석·시험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 골자다. 둘째, 첨단 군용 엔진을 기반으로 한 민수 파생형 주요 구성품 개발을 추진해, 이미 축적된 군용 기술을 민항 시장에서 재활용하는 구조를 만든다. 셋째, 고신뢰성 서브시스템과 구성품 개발을 통해 장시간 운항에서 요구되는 안전성과 정비 용이성을 확보한다.
넷째 전략 과제는 경량·초내열 항공용 엔진 소재 및 제조기술 개발이다. 고온 환경에서 강도를 유지하는 니켈 합금, 세라믹 매트릭스 복합재 등 첨단 소재와, 이를 정밀 형상으로 구현하는 첨단 주조·적층 제조 기술이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소재·제조 기술 수준은 연비, 신뢰성뿐 아니라 유지보수 비용과 직결되기 때문에, 세계적인 엔진사와의 기술 격차를 줄이는 핵심 영역으로 꼽힌다. 다섯째로 제시된 항공용 엔진 민군공통 감항인증 기술은 군용 개발과 민수 판매를 동시에 고려하는 설계·시험·인증 체계를 의미한다. 군 표준과 민간 국제 감항 기준을 교차 충족할 수 있는 시험 규격 수립과 인증 데이터 패키지 구축이 주요 과제가 될 전망이다.
우주항공청은 이러한 기술 개발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방위사업청,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등과의 부처 간 공조를 전제로 한다고 못 박았다. 방위사업청은 군용 엔진 개발과 양산 경험을, 산업통상자원부는 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 정책을, 국토교통부는 민간 항공기 감항인증과 운항 규정을 담당해온 만큼, 세 기관의 규제와 지원 체계를 정합적으로 설계해야 실질적인 민군 연계가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우주항공청은 이번 공청회에서 나온 산·학·연 전문가 의견을 수렴한 뒤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연말까지 기술 로드맵과 핵심 기술 개발 사업의 최종안을 확정할 계획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항공 엔진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 재편 경쟁이 진행 중이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엔진사는 고바이패스 터보팬 고도화와 함께, 저탄소 연료 대응 및 하이브리드 추진 등 차세대 기술 투자를 병행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은 자국 대형 여객기용 엔진 국산화 비율을 높이고 있으며, 인도와 중동 국가들도 국산화 및 공동 개발 수요를 키우고 있다. 국내 업계가 민항용 엔진 기술을 확보할 경우, 해외 기체 제조사와의 부품 공급 협력이나 공동 개발 참여 기회가 열릴 수 있지만, 품질과 신뢰성에서 이미 수십 년 앞선 글로벌 플레이어와의 격차를 얼마나 빠르게 좁히느냐가 관건으로 지목된다.
전문가들은 국내 엔진 산업이 그간 병기 특성에 맞춘 단수명 엔진과 정비 중심 산업 구조에 익숙해져 있었던 만큼, 민항 시장에서 요구하는 장수명·고신뢰·경제성 중심의 설계 철학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연속 운항 시간이 길고 정비 주기 예측과 전 수명 관리가 중요한 민항 엔진에서 세계 수준의 안정성을 입증하려면, 단순 시험을 넘어 수년간의 운항 데이터 축적과 국제 인증 획득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도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김현대 우주항공청 항공혁신부문장은 공청회에서 군용 중심 국내 항공 엔진 산업 구조를 민수용 엔진 분야까지 확장해 자립도를 높이고, 글로벌 시장 진출 기반을 차근히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산업계에서는 이번 로드맵이 기술 개발과 제도 정비, 민군 협력 구조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으려는 첫 시도라는 점에서, 향후 예산 반영과 프로젝트 실행 과정에 따라 국내 항공 엔진 산업의 위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며 실제 시장 안착 여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