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순례자, 정읍을 걷다”…역사와 자연이 겹치는 산책길의 유혹
매끄럽게 맑은 아침, 정읍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여름의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9월이지만, 사람들은 잠시 느려진 계절의 틈에서 자연과 역사가 숨 쉬는 고요함을 찾으려 이곳을 걷는다. 예전에는 그저 호남 내륙의 교통 요충지로만 불리던 정읍이, 지금은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고 싶은 이들의 휴식처가 됐다.
가장 먼저 발길을 이끄는 곳은 내장산 자락, 곳곳에 천년 고찰 내장사가 숨어 있다. 가을 단풍이 유명하지만, 초가을의 푸른 숲도 감탄을 자아낸다. “군더더기 없이 맑은 숲내음에 마음까지 조용해졌다”며 방문객들은 산사의 정취를 오래 곱씹는다. 산간의 공기는 29도의 늦더위에도 눅눅함 대신 평온과 여유를 담아 내뱉는다. 백제 건축 양식이 살아 있는 대웅전과 겸손하게 배치된 암자들은 오랜 세월을 말없이 건너온 듯하다.

숲길을 따라 템포를 늦추면, 산내면에 자리한 식물원 ‘정읍오브제’가 불쑥 나타난다. 이국적인 식물과 넓은 녹지는 “도시에서 벗어나 보는 색다른 풍경”이라는 감상을 자아낸다. 감각적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가며 마음이 닿는 포토존에선 주저 없이 셔터를 누르게 된다. 산책과 사진, 그리고 잠깐의 멈춤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크고 작은 위로를 건넨다.
정읍의 서쪽, 칠보면으로 이동하면 한적한 논길과 작은 숲에 둘러싸인 무성서원이 여행의 마침표처럼 자리한다. 조선시대 인재를 길렀던 이곳은 건물 하나하나, 정자와 뒷동산 소나무까지도 흐트러짐이 없다. “과거 선비들이 꿈꾸던 느림과 성찰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새삼 배운다”는 방명록 한 줄이 오래 여운을 남긴다. 방문객들은 서원의 고요함 속에서 선현들의 학문과 정신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이런 변화는 여행이 단순한 이동이나 소비가 아닌, 내면을 다듬는 시간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관광객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 역시 “평범한 일상 속 숨은 명소에서 하루를 달리 채워본다”며 일상의 작은 전환점으로 정읍의 자연과 유산을 손꼽는다.
전문가들은 “현대적 여행의 본질은 힐링이 아니라, 나와 공간이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의 경험”이라 평한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잘 놀고 잘 쉬는 법’이란 거창한 목적보다 그저 걷고, 바라보고, 느끼는 일에 더 마음이 닿는 듯하다.
가을 여행의 시작점에서 정읍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각자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배경이 된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