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바이오

"장기이식 플랫폼"…한국장기조직기증원, 생명나눔 확산으로 의료혁신 거든다

박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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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뇌사에 빠진 50대 남성이 장기기증을 통해 4명에게 새 삶을 열어주면서, 국내 장기이식 시스템과 이를 뒷받침하는 의료 IT 인프라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이 운영하는 국가 장기·조직 기증 네트워크는 기증자 발굴부터 장기 상태 평가, 수혜자 선정, 이송까지를 디지털로 관리해 이식 성공률과 시간 효율을 높여왔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고도화된 장기 매칭 데이터베이스와 병원 간 정보 공유 플랫폼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지점으로 본다. 고령화로 장기이식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공공의료 데이터와 IT 기반 이식 인프라가 향후 바이오·헬스케어 산업 전반의 핵심 기반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8월 19일 가톨릭대학교 의정부성모병원에서 55세 노승춘 씨가 뇌사 장기기증으로 4명의 생명을 살리고 운명을 달리했다고 밝혔다. 노 씨는 8월 10일 교통사고로 긴급 이송됐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했고, 의료진 판정에 따라 뇌사 상태로 전환됐다. 이후 국가 장기이식 관리체계에 연계되면서 심장, 폐, 간, 신장이 각각 대기자에게 이식됐다. 장기 상태와 혈액형, 체격, 긴급도 등 복합 지표는 장기이식 정보시스템에 입력돼 전국 대기자 데이터와 실시간으로 비교됐고, 이식 적합도가 높은 수혜자가 선정됐다.

국내 장기이식 시스템은 의료진의 임상 판단과 더불어 IT 기반 매칭 기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과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등이 공동으로 구축한 장기이식 관리 플랫폼은 기증자의 의무기록, 검사 결과, 영상자료를 표준화된 포맷으로 수집한다. 이 데이터는 장기별 기능 상태를 수치화하고, 장거리 이송에 따른 이식 가능 시간 등 변수를 계산해 최적 수혜자를 찾는 데 활용된다. 과거에는 병원 단위 연락망과 수기 기록에 의존했다면, 현재는 통합 시스템과 응급의료망을 연계해 골든타임을 앞당기는 구조로 진화했다.

 

노 씨의 장기기증 과정에서도 이러한 디지털 인프라가 작동했다. 사고 이후 뇌사 가능성이 확인되자 병원은 기증원과 연계됐고, 기증 적합성 평가가 이식 네트워크에 등록됐다. 중앙 시스템은 대기자의 의료정보와 기증자 데이터를 자동 매칭해 잠정 대상자를 도출했고, 이후 이식병원 의료진이 임상적 검토를 거쳐 최종 수혜자를 확정했다. 특히 심장과 폐 등 허용 이식 시간이 짧은 장기의 경우, 이식병원과 이송팀의 동선, 항공·지상 운송수단까지 시스템 상에서 동시에 조율됐다. 의료계에서는 이러한 통합 조정 능력이 이식 성공률을 높이는 핵심 경쟁력으로 평가하고 있다.

 

기증 결정의 배경에는 가족의 비극과 희망이 동시에 자리했다. 사고 다음 날이 아들의 생일이었던 만큼 가족의 충격은 컸지만, 평소 노 씨가 장기기증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혀왔고, 삶의 마지막 순간 누군가에게 생명을 나눠주고 싶다는 뜻을 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노 씨의 6살 손자가 선천적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나 장기·조직 기증의 의미를 가족이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가족은 좋은 일을 하면 언젠가 손자에게도 더 밝은 세상이 열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증을 선택했다고 전했다.

 

노 씨는 경기도 파주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자영업과 공장 건설 업무 등 다양한 일을 해온 가장이었다. 주변에서는 밝고 활동적인 성격에 어려운 이웃을 먼저 챙기던 인물로 기억한다. 사고 전날까지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현장에서 일했고, 힘든 내색 없이 가족을 우선시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는 게 유가족의 설명이다. 아내 윤정임 씨는 남편이 지키고자 했던 가족을 이제 자신이 이어받아 지키겠다며, 장기기증을 통해 남겨진 이들이 새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사례는 국내 장기기증 문화와 장기이식 네트워크의 구조적 과제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한국은 장기이식 의료 수준은 세계 상위권으로 평가되지만, 인구 대비 기증률은 주요 선진국보다 낮은 편이다. 특히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로 신장, 간 등 장기이식 대기자는 꾸준히 늘고 있고, 디지털 이식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이더라도 기증자 기반이 넓어지지 않으면 구조적 병목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공공 데이터 플랫폼과 AI를 접목해 이식 예후 예측 모델을 고도화하고, 기증·이식 전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시도가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해외에서는 장기이식 플랫폼과 정밀의료 데이터가 결합하는 흐름도 가속 중이다.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는 유전체 정보와 임상 데이터를 활용해 이식 전 거부반응 가능성을 예측하거나, 장기 상태를 AI 영상 분석으로 평가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디지털 병리, 영상 AI, 전자의무기록을 연계한 이식 의사결정 지원 기술이 연구 단계에 올라 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과 같은 공공기관은 이 과정에서 중립적 데이터 허브 역할을 수행하면서, 의료기관·IT 기업과 협업을 넓혀가는 방향을 모색하는 분위기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원장은 노승춘 씨와 유가족의 결단에 감사를 전하며, 생명나눔의 선순환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장기기증을 둘러싼 인식 개선 캠페인과 더불어, 투명한 데이터 관리와 공정한 매칭 시스템이 신뢰를 높이는 전제 조건이라고 보고 있다. 의료계와 IT 업계, 정책 당국이 함께 장기이식 인프라를 고도화할 수 있을지, 산업계는 이번 사례가 남긴 숙제를 주시하고 있다.

박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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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기조직기증원#노승춘#장기이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