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간호사 위임직무 12개 공개”…서울대병원, 표준모델 제시로 교육격차 줄인다
진료지원간호사, 이른바 PA간호사의 업무 범위와 교육 체계가 처음으로 정량 기준을 갖춘 표준모델로 제시됐다. 서울대병원이 응급상황 대응, 초기 조치, 처방 관리 등 위임가능전문직무 12개를 구조화해 공개하면서, 그동안 병원마다 달랐던 교육 편차와 역할 모호성 해소의 분기점이 될지 주목된다. 업계에서는 이번 모델이 향후 진료지원업무 교육시행규칙의 기본 틀로 활용될 경우, PA간호사 제도화 논의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서울대병원은 11일 제일제당홀에서 진료지원업무 역량개발 심포지엄을 열고, 진료지원간호사 직무를 정량 분석해 도출한 위임가능전문직무 12개, 이른바 EPA와 단계별 교육·수련체계를 19일 공개했다. 이번 결과는 서울대병원이 2025년 전략연구과제로 추진한 진료지원간호사 직무·역량 기반 교육과정 개발 TF의 성과다. 국내에서 PA간호사 영역에 EPA 기반 교육·수련체계를 체계적으로 적용한 것은 처음이다.

진료지원간호사는 환자 평가와 기록, 처방 지원, 처치·시술 및 수술 지원, 체외순환, 교육·상담 등 다양한 진료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전문 인력이다. 다만 최근 환자 중증도 증가와 의료기술 고도화로 업무 범위와 복잡성이 확대되면서, 개별 병원과 진료과에 따라 역할 정의와 교육 수준이 크게 달라지는 문제가 반복돼 왔다. 현장에서는 같은 PA간호사라도 숙련도와 교육 경험에 따라 수행 가능한 역할이 달라지면서, 환자 안전과 책임 범위에 대한 우려도 제기돼 왔다.
서울대병원 연구팀은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세 단계의 연구를 병행했다. 첫 번째 직무분석 연구에는 진료지원간호사 150명이 참여해 11개 주요 직무의 중요도와 수행 수준을 평가했고, 교수 및 간호관리자 14명이 같은 직무의 난이도와 환자안전 영향도를 따로 분석했다. 두 집단의 평가를 합산해 직무역량지수를 산출한 결과, 중증 환자관리, 전문적 간호중재, 교육 및 상담, 처방·검사관리, 상태 모니터링 및 환자 사정 등 다섯 직무가 공통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여 심화 직무로 분류됐다. 이는 현장 인식과 전문가 평가가 수치로 일치한 첫 근거로, 진료과별로 심화 직무 구성 비율이 다른 만큼 과별 맞춤형 교육모듈 설계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직무만족 및 역할변화 조사에서는 상급실무를 처음 맡는 진료지원간호사를 대상으로 설문과 심층면담을 진행했다. 조사 대상자는 업무량 증가와 역할 모호성 탓에 초기에는 높은 스트레스와 혼란을 겪는다고 답했다. 반면 현장에서의 존중과 인정, 조직 차원의 제도적 지원, 직무를 통한 성장 경험, 병원 운영에 대한 실질적 참여가 이뤄질 때 성공적인 역할전환이 가능하다고 응답했다. 연구팀은 PA간호사가 독립적인 전문 인력으로 자리 잡으려면 개인 역량보다 구조화된 교육과 공식적인 조직 지원 체계가 핵심이라는 점이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세 번째 직무·역량 기반 교육·수련체계 설계 연구에서는 PA간호사가 임상 현장에서 수행하는 업무를 표준화해 핵심 위임가능전문직무 12개를 도출했다. EPA는 일정 수준의 감독 아래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실무 단위를 의미하며, 환자 사정 및 계획 수립, 처방 관리 및 모니터링, 처치·시술 수행 및 평가, 근거기반 중재 설계 및 평가, 환자 상태 변화 관찰 및 초기 조치, 응급상황 대응 및 후속 조치, 환자·가족 치료 설명 및 의사결정 지원, 다학제 협업 및 진료 조정 참여, 전환기 관리 및 환자교육, 임상기록 및 정보관리, 질 향상 및 근거기반 연구, 전문직 리더십 및 교육 등 진료지원간호사의 핵심 업무 전반을 포괄한다. 특히 응급상황 대응과 초기 조치, 처치·시술 수행 등 의료법상 논쟁이 집중되는 영역이 EPA 항목 안에서 구체화된 점이 현장 적용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연구팀은 이 12개 EPA를 기반으로 단기 연수 중심이 아닌 4단계 성장 모델을 설계했다. 단계는 입문기인 Phase 1, 초기수행기인 Phase 2, 독립수행기인 Phase 3, 전문가기인 Phase 4로 구성된다. 입문기 단계는 공통이론, 공통술기, 분야별 이론과 술기, 현장실습으로 설계된 모듈형 교육과정으로, 각 모듈을 평가할 도구도 함께 마련했다. PA간호사 교육이 단발성 연수가 아닌 경력 축적과 연계된 능력 단계로 구분된 것은 국내에서 첫 시도다.
서울대병원은 이번 체계가 향후 마련될 진료지원업무 교육시행규칙의 표준모델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직무별 난이도와 환자안전 영향도, EPA 수준에 따라 교육시간과 평가 기준을 규정할 수 있어, 병원 규모에 따른 교육 편차를 줄이고 최소 안전 기준을 확보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응급대응, 처치·시술, 처방 관리 등 논쟁이 큰 영역에 대해 감독 수준과 교육 단계별 허용 범위를 명료하게 설정하면 의료 현장의 법적·윤리적 부담도 줄어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심포지엄에서는 진료지원간호사 교육과정 표준화를 위한 기관의 역할과 제도적 지원을 주제로 한 패널토의도 진행됐다. 신연희 분당서울대병원 간호본부장, 김유선 서울대병원 교수, 육미진 진료지원간호사, 유종원 서울대 간호대학 교수 등이 참여해 병원, 대학, 현장 간호사, 학계가 각각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논의했다. 패널들은 PA간호사의 역할을 명확히 규정하고, 국가 차원의 교육 인증과 평가 체계를 도입하는 것이 향후 제도화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영태 서울대병원장은 이번 연구가 진료지원간호사의 핵심 직무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단계별 역량개발 체계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김 병원장은 법과 제도 변화에 안정적으로 대비하고 전문 인력 양성과 환자안전 중심의 진료 수준을 높이기 위한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겠다고 강조했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서울대병원 모델이 실제 정책과 현장에 얼마나 빠르게 안착할지, 그리고 PA간호사 제도의 향후 논의 방향을 어떻게 바꿀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