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서 의료AI 쓴다”…국산 솔루션, UAE 병원 선점 노린다
의료 인공지능 기술이 중동 보건의료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메가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가 이재명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 국빈 방문을 계기로 첨단기술과 헬스케어 협력을 확대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일찌감치 UAE에 진출한 국내 의료AI 기업들이 국가 암 검진과 군 병원 등 핵심 분야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 업계는 이번 정상외교를 계기로 한국산 의료AI의 GCC 전역 확산 경쟁이 본격화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1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딥노이드, 루닛, 뷰노, 뉴로핏 등 국내 의료AI 기업들은 두바이와 아부다비를 거점으로 UAE 의료시장 내 영향력을 빠르게 키우고 있다. 각사는 병원용 영상판독 보조에서 군 병원, PET 분석 솔루션까지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며 실사용 레퍼런스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다.

딥노이드는 지난해 두바이에 지사를 설립하고 AI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와 보안 솔루션을 앞세워 현지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두바이를 전초기지로 삼아 UAE 전역에서 레퍼런스를 확보한 뒤,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바레인, 오만 등 걸프협력회의 회원국으로 사업을 확장한다는 전략이다. 중동 내 의료 인프라가 빠르게 고도화되는 상황에서 병원 정보시스템과 영상의학 워크플로에 AI를 결합해 진단 정확도와 효율을 동시에 높이려는 수요를 노린 구조다.
중동 최대 통합의료서비스 기관과 손잡은 곳도 있다. 루닛은 올해 3월 UAE 아부다비 병원관리청 SEHA와 유방촬영술 AI 영상분석 솔루션 루닛 인사이트 MMG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아부다비 국가 유방암 검진 사업에 착수했다. SEHA는 14개 종합병원과 70개 클리닉, 3000개 이상 병상과 2300명 이상 의사를 보유한 공공의료 네트워크로, 루닛의 솔루션은 대규모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한 선별검사 환경에서 성능을 검증받게 된다.
루닛의 SEHA 진입은 장기간 현지 검증을 거친 결과로 평가된다. 회사 측은 2022년 10월 SEHA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뒤 약 2년에 걸쳐 현지 의료기관과 성능 검증을 진행했으며, 암 병변 검출 민감도와 판독 효율을 수치로 입증한 것이 계약 체결의 핵심 배경으로 보고 있다. 의료진은 기존 유방촬영 영상 판독에 AI가 표시한 의심 병변 정보를 결합할 수 있어, 대규모 스크리닝 환경에서도 판독 누락 우려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군 병원 시장을 선제적으로 공략한 사례도 주목된다. 뷰노는 지난해 UAE 국군 병원인 자이드 군 병원에 AI 기반 X선 판독 보조 솔루션을 공급했다. 자이드 군 병원에 도입된 패키지는 이동형 엑스레이 장비에 뷰노메드 체스트 엑스레이를 탑재한 형태로, 별도의 차폐 시설이 없는 야전 환경이나 응급 상황에서도 흉부 영상을 촬영한 뒤 수 초 내 AI 판독 결과를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이 솔루션은 흉부 영상에서 폐렴, 결핵 의심 병변 등 주요 이상 소견을 자동 표기하고 위험도를 정량화하는 방식으로 의료진을 지원한다. 특히 군 병원처럼 다양한 연령대와 기저질환을 가진 환자가 섞여 있는 환경에서는 영상 선별과 우선 진료 대상 분류에 AI가 기여할 수 있어, 의료인력이 제한적인 중동 군 의료 체계에 적합한 모델로 평가된다.
뇌 질환 영상 분석 특화 기업 뉴로핏은 현지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GCC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뉴로핏은 두바이 소재 의료장비 유통사 모다위나 메디컬과 독점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고, PET 영상 분석 솔루션 뉴로핏 스케일 펫 공급에 나선다. 모다위나 메디컬은 병원과 응급의료장비, 영상의학 및 핵의학 장비 유통을 담당하는 기업으로, 뉴로핏은 이를 통해 UAE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카타르까지 공급망을 넓힌다.
계약은 연간 최소 구매 물량을 규정한 구조로, 뉴로핏은 2028년까지 3년간 단계적으로 공급량을 확대할 계획이다. 뉴로핏 스케일 펫은 PET 영상을 시각적·정량적으로 분석하는 솔루션으로,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 질환에서 뇌 대사 이상 부위를 자동 정량화해 진단과 질병 진행 모니터링을 지원한다. 복잡한 영상 후처리 과정을 자동화해 사용 절차를 단순화한 것이 특징이며, 고가의 PET 장비 도입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중동 병원의 니즈와 맞닿아 있다.
국내 의료AI 기업들이 UAE를 우선 공략지로 선택한 배경에는 시장 성장성과 규제 환경이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두바이무역관에 따르면 올해 UAE 의료기기 시장 규모는 약 13억5820만 달러로 추산되며, 연평균 4.7퍼센트 성장해 2029년에는 16억1960만 달러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 주도 병원 신축과 사보험 확산, 의료관광 수요가 겹치면서 IT·디지털 헬스 투자가 함께 늘어나는 구조다.
의료AI만 놓고 보면 성장 속도는 더 가파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그랜드뷰리서치에 따르면 UAE 의료AI 시장은 연평균 34.6퍼센트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1억3790만 달러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된다. 영상판독 보조를 넘어 질병 예측과 치료 계획 수립, 병원 운영 최적화 등으로 응용 범위가 넓어지면서 고부가가치 IT 솔루션 수요가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UAE를 발판으로 한 GCC 전역 확산 경쟁도 본격화될 것으로 본다. 중동 주요 국가는 석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국가 장기 전략 속에 헬스케어와 바이오, 스마트병원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의료AI와 원격의료는 이 전략의 핵심 축으로 거론된다. 한국 기업은 영상의학 중심 AI와 병원 IT 인프라 구축 경험을 앞세워 유럽과 미국 기업과 차별화를 꾀하는 한편, 현지 파트너와의 합작 모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UAE 시장 선점이 국내 의료AI 산업의 글로벌 위상에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한 의료AI 업계 관계자는 현지에서 성능과 신뢰성을 입증해 국가 검진과 군 병원 같은 공공 프로젝트 레퍼런스를 확보하면, 사우디와 카타르 등 인근 국가에서의 수주 가능성도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중동 특유의 데이터 보호 기준과 인허가 절차에 맞춘 현지화 전략이 병행돼야 지속적인 사업 확대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국내 의료AI 기업들의 UAE 진출은 단순한 수출을 넘어, 디지털 헬스케어와 국가 의료 시스템 혁신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 기술의 존재감을 가늠하는 실험대로 평가된다. 산업계는 이번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이 실제 중동 시장에 안착해 안정적 수익과 추가 투자로 이어질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