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가리 막걸리, 여전히 미궁”…경찰 재수사로 본 16년 만의 원점 수사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 사건’으로 불린 2009년 순천 막걸리 독극물 살인 사건이 재심 무죄 선고 이후 16년 만에 미제로 전환되며, 경찰이 진범 찾기에 다시 나섰다. 강압 수사와 자백 신빙성을 둘러싼 논란 속에 장기 수사·재판의 허점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7일 전남경찰청 형사기동대는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 사건’을 공식 미제 사건으로 분류하고 전담 수사팀에 재배당해 재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가정 먼저 당시 수사 및 공소 기록 전반을 확보해 정밀 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사건은 2009년 7월 전남 순천시 황전면 한 마을에서 발생했다. 청산가리가 섞인 막걸리를 나눠 마신 주민 4명 가운데 2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독극물의 출처와 투입 경위를 둘러싸고 마을 전체가 수사 대상이 됐고, 사건 직후 약 7주간 대대적인 탐문 수사가 이어졌다.
수사 과정에서 검찰은 피해자의 남편이자 마을 주민인 백씨와 그의 딸을 피의자로 특정했다. 경찰은 피의자 특정 이후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두 사람이 아내이자 친모를 살해하기 위해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섞어 마을 주민에게 건넨 것으로 보고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1심 재판부는 2010년 2월 “주요 진술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부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2011년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받아들여 살인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고, 아버지에게 무기징역, 딸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2012년 대법원도 2심 판단을 유지하며 형이 확정돼, 부녀는 중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사건은 10년이 넘는 수감 기간 동안에도 논란이 계속됐다. 백씨 부녀 측은 2022년 재심을 청구하며 “강압 수사를 통해 허위 자백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관할 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자 검찰은 이에 항고했지만, 2023년 9월 대법원이 재항고를 기각하면서 재심 절차가 본격화됐다.
지난달 28일 광주고법은 재심에서 백씨 부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재판부는 수사 당시 확보된 핵심 자백 진술이 강압적 조사 환경에서 만들어졌다고 보고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2심과 대법원에서 유죄 판단의 핵심 근거가 됐던 진술 구조가 무너졌고, 범행 공모 및 실행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도 부족하다고 보았다.
재심 무죄 확정으로 사건은 다시 ‘진범 미상’ 상태가 됐다. 전남경찰청은 당시 경찰이 작성해 검찰에 넘긴 수사 기록, 검찰이 범행 주체를 특정하는 근거로 삼았던 진술·참고인 조사·감정 결과 등 관련 자료를 모두 확보해 왜곡·누락 여부를 따져볼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과거 수사 과정 전반을 다시 살펴 수사의 공백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새로운 단서가 있는지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이번 재수사 과정에서 쟁점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진범 규명 문제다. 치명적 독극물이 사용돼 2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은 중대 사건임에도, 당시 수사가 특정 피의자에 집중되면서 다른 가능성이 충분히 검증됐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둘째는 강압 수사 및 위법 수사 가능성에 대한 검토다. 재심 재판부가 자백의 증거 능력을 배제할 정도의 강압성을 인정한 만큼, 당시 조사 방식과 인권 침해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 사건을 통해 자백 중심 수사 관행과 장기 미제 사건 처리 방식에 대한 제도 개선 논의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유죄 판단 뒤 10년 넘게 복역한 피고인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는 사례가 이어지면서, 초기 수사 단계에서의 인권 보호와 증거 확보 절차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은 당분간 관련자 재소환 조사, 기록 재분석, 과학 수사 기법을 활용한 증거 재검토 등을 병행할 방침이다. 재수사를 통해 새로운 범행 단서가 확보될 경우, 사건은 또 한 번 법정 다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한편, 백씨 부녀가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 및 손해배상 소송에 나설 경우, 당시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의 책임 공방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청산가리 독극물 살인이라는 중대 사건이 진범 규명 없이 미제로 남은 상황에서, 경찰 재수사가 과거 수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 그리고 피해자와 억울함을 호소해온 가족 모두에게 어떤 결론을 가져올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찰은 이번 재수사를 통해 정확한 사건 경위를 다시 규명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