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일가 미등기 임원 상장사 29.4%…공정위, 감시 사각지대 확대 우려
총수일가의 미등기 임원 재직이 상장사를 중심으로 빠르게 늘고, 이사회 안건의 거의 전부가 원안대로 의결되는 현상이 확인되며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책임경영 강화 흐름 속에서도 감시·견제 기능은 여전히 미흡해 소수주주 보호와 사익편취 방지 측면에서 제도 실효성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9일 자산 총액 5조 원 이상 공시대상기업집단 92개 중 올해 신규 지정 5개와 농협을 제외한 86개 집단, 2,994개 소속회사를 대상으로 2025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총수가 있는 77개 집단 2,844개사 가운데 총수일가가 이사회 구성원이 아닌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하는 회사는 198개사로, 전체의 7.0%를 차지해 전년 대비 1.1%포인트 상승했다.

총수일가의 미등기 임원 비율이 가장 높은 집단은 하이트진로로, 12개 계열사 중 7개 사에서 총수일가가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해 58.3%를 기록했다. 뒤이어 DN이 7개 중 2개, KG가 26개 중 7개, 금호석유화학이 16개 중 4개, 셀트리온이 9개 중 2개 등으로 미등기 임원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특히 상장사에서 총수일가가 미등기 임원으로 있는 비율은 29.4%에 달했다. 전년보다 6.3%포인트 급증한 수치로, 비상장사에서의 미등기 임원 비중 3.9%의 7배 수준이다. 공정위는 투명성과 공시 의무가 상대적으로 큰 상장사에서 오히려 미등기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강해진 점에 주목했다.
총수일가 미등기 임원 직위 259개 가운데 사익편취 규제대상 회사에 속한 경우는 141개로, 비중이 54.4%에 달했다. 전년에는 220개 중 119개, 54.1%였던 것과 비교해 절대 규모가 늘어나면서 증가분 상당수가 사익편취 규제대상 회사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총수일가 1인당 미등기 임원 겸직 수가 많은 집단은 중흥건설, 한화·태광, 유진, 한진·효성·KG 순으로 조사됐으며, 총수 본인이 미등기 임원으로 여러 계열사를 겸직하는 사례는 중흥건설, 유진, 한화·한진·CJ·하이트진로에서 두드러졌다.
음잔디 공정위 기업집단관리과장은 미등기 임원 구조가 안고 있는 거버넌스 위험을 강조했다. 그는 비등기임원은 경영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등기임원과 달리 상법 등에서 규정한 법적 책임과 의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권한과 책임의 괴리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 개정된 상법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규정이 강화됐지만, 미등기임원인 총수일가가 늘어나면 개정 법의 실효성이 저하될 우려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총수일가가 등기이사로 참여하는 움직임도 함께 확대됐다. 전체 분석 대상 회사 중 18.2%에 해당하는 518개사에서 총수일가가 등기이사로 등재돼 있었다. 전체 등기이사 1만 명 내외 중 총수일가는 704명으로 7.0%를 차지해 2021년 5.6%에서 꾸준히 비중이 높아졌다. 공정위는 총수일가의 등기이사 참여 확대를 책임경영 측면에서 긍정적인 흐름으로 평가했다.
총수일가가 등기이사로 등재된 계열사 비율이 높은 집단은 셀트리온, 부영, 영원, 농심, DN 순으로 집계됐다. 전체 등기이사 가운데 총수일가 비율이 높은 집단은 부영, 영원, KCC, 농심, 반도홀딩스로 나타났다. 자산총액 2조 원 이상 상장사인 주력회사에서는 총수일가의 등기이사 참여가 더욱 뚜렷했다. 주력회사 154개사 중 68개사가 총수일가를 이사로 등재해 비율이 44.2%에 이르렀고, 이는 전체 회사 평균치 18.2%의 두 배가 넘는 수준이다.
총수 본인이 주력회사 등기이사로 재직하는 비율 역시 26.6%로, 154개사 가운데 41개사가 해당됐다. 전체 회사 기준 총수 본인 이사 재직 비중이 5.7%인 점을 감안하면 주력회사에 영향력 행사를 집중하는 양상이 뚜렷하다는 평가다. 음 과장은 총수일가의 등기이사 및 미등기 임원 증가가 동시에 나타난 점에 대해, 주력 회사에서는 책임경영 이미지를 강화하면서 사익편취 규제대상 계열사에서는 미등기 형태로 관여해 감시 사각지대를 넓히는 이중적 행태가 나타날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공정위가 이 같은 움직임을 면밀히 감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공정위는 대기업 이사회 구성과 운영 실태도 함께 점검했다. 86개 대기업집단 361개 상장사를 분석한 결과,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율은 51.3%로 전년보다 0.2%포인트 높아지며 과반을 유지했다. 사외이사는 총수일가와 경영진을 견제할 핵심 장치라는 점에서 사외이사 과반 구조는 긍정적인 요소로 평가됐다. 상법상 사외이사 선임 의무 기준인 44.2%를 넘겨 사외이사를 선임한 회사에는 현대백화점 계열 현대홈쇼핑과 대원강업, SK케미칼, SK디스커버리, SK디앤디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이사회가 실제로 경영진을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제기됐다. 공정위 분석 결과 상정된 이사회 안건의 99% 이상이 원안대로 가결됐으며, 원안과 다르게 통과된 안건 비율은 0.38%에 그쳐 최근 5년 중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사실상 이사회 논의가 형식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총수가 있는 77개 집단과 총수가 없는 9개 집단을 비교했을 때도 차이가 뚜렷했다. 총수가 있는 집단은 총수가 없는 집단에 비해 사외이사 비율이 낮고, 법상 의무 기준을 초과해 선임한 평균 사외이사 수 역시 적었다.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 비율, 보상위원회와 감사위원회 설치 비율도 총수가 있는 집단에서 더 낮았다. 공정위는 이를 근거로 총수일가의 경영활동과 보수 결정 과정에서 이사회 차원의 견제와 감시가 상대적으로 미흡한 것으로 평가했다.
소수주주의 경영 감시 도구로 알려진 집중투표제의 도입과 활용 수준은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상장사의 96.4%가 정관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배제하고 있었으며, 실제 해당 제도를 활용해 투표가 이뤄진 사례는 3년 연속 1건에 그쳤다. 전자투표제 도입과 실시 비율은 증가하는 추세다. 전자투표제를 도입한 상장사 비율은 88.1%, 실제 전자투표를 실시한 비율은 87.3%로 집계됐다. 그러나 소수주주가 전자투표를 통해 의결권을 행사한 비중은 여전히 1%대에 머물러 참여 확대 효과는 제한적인 것으로 분석됐다.
공정위는 올해 개정된 상법에서 집중투표제와 전자주주총회 도입을 의무화한 규정이 지배주주와 소수주주 간 이해상충을 완화하고 소수주주 이익 보호에 일정 부분 기여할 것으로 내다봤다. 음 과장은 이사회 감시·견제 기능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시장 감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사외이사 의무 선임 비율 확대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 개정 상법 내용이 투명한 지배구조 확립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향후 국내 대기업 지배구조의 개선 속도와 시장의 자율적 감시 기능 강화 여부가 투자자 신뢰와 기업가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