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투자 백지수표 요구에 신중 대응 필요”…한미 관세협상 교착, 국익 우선 목소리 확산
한미 관세 및 대미 투자 협상을 둘러싼 교착 국면에서 미국의 '투자 백지수표' 압박이 거세지자 전문가들은 조급한 합의보다 국익을 고려한 신중한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14일에도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 간 장관급 실무협의가 뉴욕에서 진행됐으나, 뚜렷한 진전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허윤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자동차 관세 인하를 받은 것이 급하다고 미국 행정명령의 문서화에만 매달리면 국익에 상당한 손실이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자동차도 핵심 수출 품목이지만 국민경제에 미치는 모든 영향을 다각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자동차 관세는 지난 7월 말 한미 협상에서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합의한 바 있지만, 실제 관세 인하 조치는 아직 시행되지 못했다. 한국 기업들의 조급함이 커질 수밖에 없으나, 국익 관점에서 협상의 주도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분석이 잇따른다.
한미합의의 가장 큰 쟁점인 대미 투자 규모와 방식 역시 난항을 겪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의 관세 인하 조건으로 3천500억달러(약 485조원) 투자를 약속했으나, 구체 방식과 참여 기업 범위 등 세부사항에서 양측 의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핵심 의제는 투자 관련 펀드이며, 일본 선례가 한국 협상의 부담을 키운다"고 설명했다. 실제 일본은 미국과의 무역협상에서 불리한 조건의 5천500억달러 투자 합의서를 받아들여, 미국이 투자처를 지정하면 45일 이내 자금을 투입해야 했고, 이행 불응 시 관세가 복귀되는 구조에 합의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장관회담 전날 CNBC와 인터뷰에서 "한국은 일본의 전례를 보고 있다. 유연성은 없다. 일본은 이미 서명했다"고 발언, 한국 정부에 일본 수준의 양보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한국 내에서도 일본의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정부가 협상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또한 전문가들은 대미 투자와 관련해 우리 조선, 철강, 원자력, 반도체 등 산업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명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일 투자 양해각서에도 일본 기업의 프로젝트 참여를 명시한 만큼, 한국 역시 협상에서 산업별 참여권을 확실히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장상식 원장은 "MASGA(미국 조선산업 부흥) 프로젝트, 원자력, 반도체 등 미국이 약한 분야에서 협력의 틀을 구체화하고, 민간기업 중심 투자 방식을 유럽연합(EU)·일본 모델과 절충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조언했다.
허윤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협상팀이 강한 압박으로 최종 수위 조절에 임해왔지만, 미국도 입장을 바꿀 여지가 있다"며 "우리도 시간과 여유를 갖고, 조선 프로젝트 등 활용 가능한 카드를 통해 협상 재량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과 산업계 일각에서는 7월 합의대로 관세 인하가 지연될 경우, 미국 측이 상호관세를 25%로 원상복구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장기 교착 시 한미관계 및 수출전선에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한미 실무협의와 후속 장관 회동을 통해 국익에 부합하는 투자 구조와 자동차 관세 인하 조치의 실효성 확보에 주력할 방침이다. 정가와 업계는 향후 한미 협상 결과가 양국 경제 및 세부 산업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