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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수사혁신 성큼…경찰대학, 디지털 증거 기준 논의 확산

정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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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기술이 수사 환경과 디지털 증거 활용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경찰과 학계는 AI가 방대한 수사 데이터를 신속히 분석해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보면서도, 판단 오류 방지와 절차적 투명성 확보를 위한 법적·기술적 장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내년 1월 인공지능 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AI 기반 수사의 허용 범위와 디지털 증거의 증명력을 둘러싼 논의가 수사 현장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경찰대학은 27일 충남 아산 경찰대학 세종대왕컨퍼런스홀에서 한국데이터포렌식학회와 공동으로 AI 시대의 법집행, 디지털 증거와 수사의 혁신과 한계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행사에는 대학과 연구기관, 경찰 실무 전문가들이 참석해 사이버범죄 대응 기술, 대규모 언어모델 기반 수사데이터 분석, 디지털포렌식 증명력 제고 등 최신 연구와 현장 적용 사례를 공유했다.  

김성희 경찰대학장은 환영사에서 AI 기술은 방대한 정보를 빠르게 처리해 수사 효율을 높일 수 있지만, 판단 오류와 절차적 영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년 1월 시행되는 AI 기본법을 앞두고 기술 적용 기준과 운영 절차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공공 영역에서 AI가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비중이 커지는 만큼, 수사 단계별 책임 범위와 오류 발생 시 통제 메커니즘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취지다.  

 

한국데이터포렌식학회를 이끄는 박노섭 학회장은 AI를 공공안전과 수사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평가하면서도 법적·윤리적 고려가 필수적이라고 짚었다. 기술의 혁신성과 한계를 함께 점검하는 것이 이번 논의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수사기관이 활용하는 AI 모델이 편향된 데이터에 기반할 경우 특정 집단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만큼, 알고리즘의 공정성과 설명 가능성을 확보하는 방안이 병행돼야 할 과제로 언급됐다.  

 

제1세션에서는 김지온 한림대 교수가 사이버범죄 수사단서 분석·추론 기술을 발표했다. 김 교수는 다중피해가 발생하는 사이버범죄에서 초기 대응이 지연되고 증거가 소실되는 주요 원인으로 데이터 폭증, 사건 배당 지연, 정보 파편화를 꼽았다.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기기를 경유하는 범죄 특성상, 계정 정보와 로그 기록, 금융 거래, 통신 내역 등이 여러 기관과 사업자에 분산돼 있어 신속한 연계 분석이 어렵다는 분석이다. 김 교수는 산발적으로 흩어진 단서를 AI 기반으로 통합 분석하고, 조직형 범죄의 관계망을 자동 추론하는 기술 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런 시스템은 다수 사건 간 연관성을 조기에 포착하고, 동일 조직이나 계좌, IP 주소를 중심으로 한 범죄 네트워크를 시각화해 수사 방향 설정을 돕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제2세션에서는 김경종 경찰대학 교수가 대규모 언어모델, 이른바 LLM 기반 수사데이터 분석 방안을 제시했다. 메신저 대화, 이미지, 문서 등 비정형 수사자료를 LLM으로 자동 분류, 요약, 구조화해 수사 단서를 신속하게 정리하는 체계를 구현하는 내용이다. 김 교수는 압수된 메시지를 기반으로 범죄일람표를 자동 생성하는 사례를 소개하며, 수사관이 일일이 대화 기록을 읽고 정리하던 과정을 줄여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미지 기반 모델을 결합해 캡처 화면과 사진 증거를 고정밀로 식별하고, 관련성 높은 자료를 우선 제시하도록 하는 등 실제 적용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다만 김 교수는 LLM 특유의 환각 문제, 즉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생성하는 오류와, 수사자료 유출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보안 설계, 적절한 프롬프트 설계 기준 마련 등 기술적 제약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사기관 내부 폐쇄망 환경에서 모델을 운용할 것인지, 외부 클라우드를 활용할 것인지에 따라 개인정보 보호와 증거 위·변조 방지 대책이 달라질 수 있어, 향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제3세션에서는 정종진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이 AI가 분석한 디지털 증거를 실제 수사와 재판에서 활용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짚었다. 정 연구원은 AI 분석 결과가 법정에서 증거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법적 기준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석 과정이 어떤 모델과 데이터, 파라미터를 통해 이뤄졌는지 추적할 수 있어야 하고, 결과에 도달한 논리 구조를 사람이 검증 가능한 수준으로 제시하는 절차가 요구된다는 설명이다.  

 

또한 정 연구원은 기술 검증을 담당할 전문가 체계 구축 필요성도 언급했다. AI 기반 디지털포렌식 도구의 정확도와 재현성을 검증하고, 버전 업데이트에 따른 결과 변동을 관리할 독립적 검증 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논의가 활발한 알고리즘 감사, 모델 평가 기준 등을 국내 현실에 맞게 도입하는 방안도 중장기 과제로 꼽혔다. 이런 기준이 마련돼야 향후 AI 분석 결과가 수사기관 내부 참고자료를 넘어, 법원에서 증거의 신빙성을 둘러싼 다툼 속에서도 일정 수준의 공신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제시됐다.  

 

미래인재 세션에서는 경찰대학을 비롯해 한림대, 고려대, 성균관대 학생 연구자들이 사이버범죄, 수사데이터 활용, 디지털 포렌식 등 치안 현장의 다양한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젊은 연구자들은 암호화 메신저와 다크웹을 활용한 신종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데이터 분석 기법, 모바일 기기와 클라우드 환경에서의 증거 수집 절차 정비 방안 등 실무와 밀접한 주제를 다루며 현장과 학계의 연결 고리를 넓혔다.  

 

경찰대학은 앞으로도 AI 시대 치안 환경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현장에서 요구되는 디지털 인재 양성과 신뢰받는 법집행을 위해 실증적이고 책임 있는 교육과 연구를 지속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산업계와 공공 부문에서는 이번 논의가 AI 기반 수사기술의 도입 속도뿐 아니라, 제도와 윤리 기준이 얼마나 정교하게 뒷받침될지에 따라 실제 효과가 갈릴 수 있다고 보고, 향후 관련 논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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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대학#한국데이터포렌식학회#ai기본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