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바이오

“조력자살 허용 4년차” 독일, 인간 존엄 논쟁 재점화

조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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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가 의료·바이오 영역에서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독일에서 조력 자살이 합법화된 지 4년이 지나면서, 연명의료 중단과 안락사, 완화의료, 디지털 헬스케어가 하나의 연속선 위에서 논의되는 양상이다.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 의료비 부담 확대가 겹치며 생명 연장의 기술만큼이나 존엄한 죽음의 조건을 제도와 기술로 어떻게 뒷받침할지에 대한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독일의 조력 자살 제도가 동의 절차, 데이터 관리, 의료윤리 기준 측면에서 글로벌 바이오·의료 규범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독일 매체에 따르면 최근 독일의 대표적 쌍둥이 스타가 독일인도적죽음협회에 가입해 조력 자살 절차를 사전 준비한 뒤 같은 날 생을 마감했다. 독일 경찰은 외부 압력이나 범죄 정황을 배제했다. 독일은 2020년 연방헌법재판소가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한 뒤, 의사의 약물 처방과 본인의 자발적 복용을 전제로 한 조력 자살을 허용하고 있다. 다만 의사가 직접 치사약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여전히 금지 대상이다.  

조력 자살의 기술적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의사는 치사량에 해당하는 약물을 처방하고, 환자는 충분한 설명과 서면 동의를 거친 뒤 스스로 약물을 복용한다. 마지막 행위를 반드시 본인이 직접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임상 기록, 진단 결과, 정신적 상태 평가, 동의서 등 방대한 의료 데이터가 쌓인다. 독일은 이 정보를 전자의무기록 형태로 관리하며, 사후 법적 분쟁에 대비해 동영상 기록이나 다중 서명 절차를 병행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기존 연명의료 중단이 인공호흡기 제거 등에서 의료진의 역할이 컸던 것과 달리, 조력 자살은 기술적으로 환자 행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구조여서 의료 시스템 설계 방식도 크게 다르다.  

 

독일 제도는 몇 가지 요건을 강조한다. 첫째, 외부 압력 없이 완전히 자발적 의사 결정이어야 한다. 둘째, 관련 정보를 이해하고 판단할 인지 능력이 확인돼야 한다. 셋째, 충분한 숙려 기간과 상담 과정을 거친 뒤 결정이 반복 확인돼야 한다. 정신과 의사와 윤리위원회가 참여하는 복수 검증 구조도 일반적이다. 정신적 고통보다는 육체적·의학적 고통, 삶의 질 저하 등이 주된 고려 요인으로 평가되며, 협회와 의료진은 우울증 등 일시적 정신 상태에 기인한 결정을 배제하려고 체크리스트를 정교하게 운용하고 있다.  

 

조력 자살을 둘러싼 시장·서비스 구조도 변하고 있다. 독일인도적죽음협회와 같은 단체는 법률 자문, 의료진 연계, 문서 정리, 증인 확보, 심리 상담을 패키지로 제공하는 일종의 생애말기 컨설팅 역할을 맡는다. 의료기관 측면에서는 중환자실·호스피스 병동 운영 전략이 바뀌고 있다. 통증 관리, 정신건강 지원, 가족 상담, 디지털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관리 플랫폼이 하나의 통합 서비스로 엮이는 흐름이다. IT 기반 헬스 데이터 플랫폼 기업들은 조력 자살 여부와 무관하게,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말기 치료 계획을 표준화된 구조화 데이터로 저장해 다기관에서 공유하려는 솔루션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글로벌 비교에서 독일은 중간지대에 위치한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는 특정 조건에서 의사가 직접 투약하는 적극적 안락사까지 허용하고 있으며, 캐나다도 의료조력죽음 제도 범위를 확대하는 추세다. 반면 미국은 다수 주에서 의사조력자살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생애말기 의사결정 데이터의 주별 관리 방식이 크게 다르다. 일본과 한국 등 다수 아시아 국가는 연명의료 중단만 조건부 허용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 법·제도 격차가 크다. 전문가들은 독일식 모델이 생명권을 중시하는 국가와 자율권을 강조하는 국가 사이의 절충안으로 참고될 수 있다고 본다.  

 

정책·규제 측면에서는 아직 과제가 많다. 독일 연방의회는 구체적인 조력 자살 절차·감독법 제정에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환자 자율성과 취약계층 보호 사이의 기준 설정을 두고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의료계는 고령층, 장애인, 경제적 취약계층에게 사회경제적 압력이 사실상의 강제 선택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종교계와 윤리학계는 조력 자살을 허용할수록 생명 가치가 약화되고, 금융·보험·장기요양 제도와 결합할 경우 구조적 차별이 심화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에 맞서 환자 단체와 일부 법학자들은 자기결정권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되, IT 기반 동의 절차 기록과 독립 심사 기구, 무작위 사후 감사 등 디지털·제도적 방파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헬스 IT와 바이오 분야에서는 조력 자살 논쟁이 데이터 활용과 직결된다. 우선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유전체 정보, 만성질환 이력, 통증·기능평가 지표 등 방대한 개인 건강 데이터가 생성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사망 시점과 기능 저하를 예측하는 알고리즘 연구가 진행 중이다. AI가 제시한 예측 결과가 말기 환자의 심리와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알고리즘 편향과 설명 가능성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는 상황이다. 또 조력 자살 데이터는 임상연구, 완화의료 품질평가, 의료 자원 배분 모델링에 활용될 수 있지만, 사후 데이터 사용 동의 범위와 익명화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들어섰다.  

 

국내 의료계와 정책 당국도 독일의 제도 실험을 주시하고 있다. 한국은 연명의료결정법을 통해 연명의료 중단을 제한적으로 허용했지만, 조력 자살은 명시적으로 금지돼 있다. 다만 인구 고령화, 암·치매 등 만성질환 부담, 의료 인력 부족이 심화되면서 연명의료 중단, 호스피스 확충, 디지털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시스템 고도화가 중장기 과제로 부상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완화의료와 정신건강 지원, 사회적 돌봄 인프라를 충분히 강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력 자살 논의를 서두를 경우, 제도 남용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윤리학자들은 기술적 수단의 발전이 곧바로 제도 도입의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생애말기 의료 데이터를 정교하게 관리하고, 환자 의사결정 역량을 다각도로 지원하는 기술 인프라가 갖춰지더라도, 가족 구조 변화와 노인 빈곤, 돌봄 노동의 사회적 가치 등 구조적 요인을 외면한 채 개인 선택의 문제로만 환원하면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독일식 조력 자살 제도가 글로벌 바이오·헬스 산업에서 하나의 레퍼런스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그리고 각국이 어느 수준까지 존엄한 죽음을 법과 기술로 뒷받침할지에 따라 향후 의료 시스템의 모습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산업계는 조력 자살 논쟁이 어디까지 제도화로 이어질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IT·바이오 기술의 역할이 어디까지 허용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조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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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조력자살#독일인도적죽음협회#정신적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