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바다, 고요한 성벽”…사천에서 느끼는 역사와 풍경의 안온함
여행을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이제는 화려한 명소보다 흐린 바다, 조용한 성벽 아래서 내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경남 사천, 남해와 사천만을 요람 삼은 이 도시는 그 변화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흔히 남도 여행하면 밝은 햇살과 활기찬 시장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천에서 맞은 29도 흐림의 아침 하늘은 낮고, 바다는 조용했다. 습도 높은 공기에 긴 머리를 한 번 묶고 길을 나서자, 선진리성의 성벽 산책로가 이끄는 쓸쓸한 평화로움이 낯설 듯 익숙했다. 임진왜란의 시간이 남긴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나무 그늘 아래 잠시 앉아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런 변화는 데이터에서도 읽힌다. 지난해 한국관광공사 조사에선 ‘고요한 산책로와 역사적 명소’ 찾는 30~50대 여행객이 20% 가까이 늘었다. 북적이는 유원지보다 사람 적은 바닷가, 외진 사찰을 경험하는 여행 후기가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에 이어진다.
사천에는 동화 같은 명소도 있다. 초양도의 대관람차 ‘사천아이’에 오르면 남해와 삼천포를 잇는 대교, 그리고 한려해상 바다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엔틱한 회전목마 앞에서 저마다 사진을 남기는 풍경은 이 도시만의 잔잔한 설렘을 더한다. 다솔사에서는 깊은 숲을 지나 옛 절 마당에 서면, 차나무 잎새 향과 새소리가 흩날린다. “여기선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추게 돼요.” 한 방문객은 그렇게 자신의 여행을 표현했다.
삼천포항에서는 바닷바람을 가르며 다녀가는 어선들, 그리고 어시장에서 만나는 싱싱한 해산물이 사천만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평일 이른 아침 어시장 골목에서 “서울에선 느껴본 적 없는 여유와 활기라 좋다”는 여행자들의 소소한 대화가 들린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사천은 마음이 조용해지는 곳”, “회전목마 사진 보고 바로 버스 예약했다” 등, 바쁜 일상 속 한 템포 쉬어가고픈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행은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일상과의 작은 거리두기다. 흐린 날, 바다 사이 산책로와 오래된 절집에 머물다 보면, 피곤했던 마음이 저절로 부드러워진다. 작고 사소한 장면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