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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증성 장질환자용 영양식 기준 신설…식약처, 환자 맞춤식 시장 연다

신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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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증성 장질환자의 영양 관리를 위한 국가 차원의 식품 기준이 처음으로 마련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특수의료용도식품 영역에서 염증성 장질환자용 영양조제식품의 유형과 표준제조기준을 신설해 행정예고에 나섰다. 만성질환 환자 수 증가와 맞춤형 영양치료 수요가 커지는 가운데, 환자용 식품에 대한 세부 기준을 선제적으로 제시해 산업 성장과 식품 안전을 동시에 관리하겠다는 구상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기능성 식품을 넘어 질환별 영양치료식 시장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식약처는 23일 식품의 기준 및 규격 고시 개정안을 행정예고하고, 염증성 장질환자용 영양조제식품 유형 신설과 표준제조기준 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개정안에는 염증성 장질환자용 식품의 영양성분 기준뿐 아니라 액란 사용 제품의 제조 기준, 식품 중 농약 잔류허용기준 설정 및 조정, 식중독균 검사 방식 개선 등이 폭넓게 담겼다. 목적은 환자 맞춤형 식품 개발을 촉진하는 동시에, 원료 단계부터 완제품까지 안전관리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있다.  

새로 정의된 염증성 장질환자용 영양조제식품은 크론병과 궤양성대장염 등 염증성 장질환으로 인한 영양소 결핍을 예방·보충하고 적정 체중 유지를 돕기 위해 영양성분을 조정해 제조하는 특수의료용도식품이다. 염증성 장질환은 장 점막 손상, 흡수 장애, 만성 염증으로 인한 대사 이상 때문에 영양결핍이 흔하게 발생하는 질환이다. 그동안 환자용 특수영양식에 대한 수요는 존재했지만, 해당 질환군을 대상으로 한 표준 제조 기준이 없어 제조업체가 각자 기준을 설계하고 임상적 타당성을 입증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개발 비용과 시간 부담이 커 실제 제품 다양화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식약처가 이번에 신설하는 표준제조기준에는 단백질과 셀레늄 등 무기질 4종, 비타민 K를 포함한 비타민 10종의 적정 배합 기준이 담긴다. 영양 설계는 염증성 장질환자의 영양 요구량과 흡수 특성을 고려해 식사의 일부 또는 전부를 대체할 수 있도록 설정된다. 의료 현장에서는 경구영양제나 경관영양용 조제식 형태로 활용돼, 질환 활성도에 따른 식이 조절, 체중 감소 방지, 수술 전후 회복 지원 등에 쓰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존 일반 조제식보다 미량영양소와 단백질 구성에서 환자 특이성을 반영했다는 점이 차별점이다.  

 

이번 조치는 2022년부터 추진돼 온 질환별 환자용 식품 표준제조기준 확대 정책의 연장선에 있다. 식약처는 암, 고혈압, 폐질환, 간경변 환자용 식품에 대한 기준을 순차적으로 개발해 왔으며, 염증성 장질환 분야까지 범위를 넓히면서 만성질환·희귀질환 영역으로 확장할 토대를 마련했다. 업계 입장에서는 표준화된 기준을 바탕으로 품목 개발을 진행할 수 있게 돼, 제품 기획과 인허가 전략 수립이 한층 수월해질 전망이다. 동시에 의료진은 질환별 영양치료 프로토콜에 국가 기준을 반영함으로써 처방과 상담의 일관성을 높일 수 있다.  

 

식중독 사고 예방을 위한 공정 기준 강화도 병행된다. 식약처는 가열처리 없이 그대로 섭취하는 가공식품에 비살균 액란을 사용할 경우, 최종 제품 완성 이전 단계에서 반드시 살균 또는 멸균 처리를 거치도록 제조·가공 기준을 신설한다. 열처리를 거치지 않은 액란 원료는 살모넬라 등 병원성 세균 오염 가능성이 높아, 빵류나 디저트류 제조 과정에서 교차오염을 유발해 식중독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냉동생지처럼 최종 섭취 전에 반드시 가열 조리되는 제품은 이번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농약 잔류허용기준 관리 영역도 대폭 손질된다. 기후 온난화로 국내에서 망고 등 아열대 작물 재배가 확산되는 추세를 반영해, 식약처는 총 6개 작물에 대해 재배 시 사용되는 농약 22종의 식품 중 잔류허용기준을 새로 설정하기로 했다. 이는 새로운 작형에 맞는 안전관리 틀을 미리 제시함으로써 농가가 수출과 국내 유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안전기준이 명확해질 경우 생산·유통 과정에서 리스크를 줄이고, 장기적으로는 아열대 작물 재배 농가의 소득 기반을 강화하는 효과도 기대된다.  

 

수입 농산물 관리 강화를 위해 스피록사민 등 농약 7종에 대해서도 잔류허용기준이 신설 또는 개정된다. 글로벌 유통망을 통해 들어오는 농산물에는 국내에서 사용하지 않는 농약 성분이 포함될 수 있어, 수입국별 사용 실태와 국제 기준을 반영한 세부 허용치를 설정하는 것이 관건이다. 쌀에 적용되는 테부페노자이드 등 3종 농약 잔류허용기준은 국제식품규격위원회 기준을 참고해 정비한다. 더불어 디메설파젯 등 125종 농약에 대한 잔류허용기준을 새로 신설하거나 개정해, 전체 농약 관리체계를 국제 수준에 맞추는 방향으로 재정렬한다.  

 

검사 기술 측면에서는 동시 다성분 시험법을 확장해 국내외에서 사용 중인 농약 26종을 추가로 분석 대상에 포함시킨다. 이에 따라 총 540종 농약을 단일 시험법으로 동시 분석할 수 있게 된다. 시험실 입장에서는 분석 효율이 높아지고, 현장 단속에서는 광범위한 성분을 한 번에 점검할 수 있어 관리 공백을 줄일 수 있다. 식약처는 개정된 시험법이 실무에 안착할 수 있도록 시행 전 시험·검사기관 실무자 교육을 두 차례 진행하고, 분석에 필요한 표준품도 제공할 계획이다.  

 

식단형 식사관리식품에 대한 미생물 검사 방식도 통계적 개념을 도입해 정교화한다. 지금까지는 황색포도상구균, 장염비브리오, 클로스트리디움 퍼프린젠스 등 주요 식중독균 검사를 시료 1개만으로 수행했지만, 개정 후에는 시료 5개를 채취해 검사하도록 기준을 바꾼다. 미생물 오염이 식품 내에서 균일하지 않게 나타나는 특성상 단일 시료만으로 적합 여부를 판정하면 오염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을 반영한 조정이다. 다른 식품 검사와 마찬가지로 샘플 수를 확대해 통계적 신뢰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개선한 셈이다.  

 

이번 개정안은 식품 안전관리 고도화와 환자 맞춤형 영양 시장 육성을 동시에 겨냥한 정책 패키지라는 평가가 나온다. 염증성 장질환자용 영양조제식품 기준 신설은 의료 현장에서 영양치료를 치료 전략의 한 축으로 활용하는 추세와 맞물리며, 향후 디지털 헬스케어와 연계된 영양 처방 서비스, 병원·제조사 협력 모델 등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자극할 가능성도 있다. 동시에 액란 공정 기준 강화와 농약 잔류허용기준 확대는 기후 변화와 식생활 다변화로 복잡해지는 식품 안전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식약처 관계자는 이번 기준·규격 개정 추진이 식품 안전관리 수준 제고와 산업 발전을 함께 겨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민 건강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유통 환경과 소비 패턴 변화에 맞춰 기준·규격을 합리적으로 조정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개정안에 대한 의견 제출은 내년 2월 23일까지 가능하며, 업계와 의료계, 소비자 단체의 의견 수렴 결과에 따라 최종안이 확정될 전망이다. 산업계는 새 기준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환자용 특수영양식 시장 확대를 어느 정도 견인할지 주시하고 있다.

신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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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의약품안전처#염증성장질환자용영양조제식품#농약잔류허용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