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미국 선의에 기댈 수 없다"…이재명, 200억 달러 상한 밀어붙인 배경

임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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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관세협상을 둘러싼 치열한 기싸움 속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강경한 대미 인식이 다시 부각됐다. 미국의 압박 국면에서도 한국 정부가 연간 200억 달러 투자 상한을 명시하도록 관철한 배경에 이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향후 한미 경제협력 구도와 국내 정치 지형에도 파장이 예상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19일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에서 경주 한미 정상회담을 전후한 관세협상 경위를 상세히 전했다. 김 실장은 한국의 대미 투자 연간 상한액을 200억 달러로 못 박는 과정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의 선의를 신뢰하지 않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김 실장에 따르면 그는 지난달 경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함께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해 협상을 진행한 끝에 “거의 타결된 것 같다”고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협상 결과에 대해 김 실장은 “200억 달러 상한을 깔끔하게 얻지는 못했고 조금 더 위에 있었다”며 “이 정도면 실질적으로 200억을 넘지는 않을 것이라는 표현을 얻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은 이 표현에 만족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실장은 “이 대통령이 2∼3일 지난 뒤 더 강경하게, 깔끔한 200억 달러 아니면 못 하겠다고 하셨다”며 “표현을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이 “선의를 기반으로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할 순 없다”고 언급했다고 소개했다. 미국 행정부나 의회의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여지를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풀이된다.

 

양측 입장이 끝까지 평행선을 그리면서 정상회담 직전까지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고 김 실장은 전했다. 국면 전환의 단초는 정상회담 당일 아침 마련됐다. 김정관 장관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에게 APEC 일정은 예정대로 소화하되 관세협상은 이어가자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면서 협상판이 다시 움직였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러트닉 장관으로부터 200억 달러를 확정하면 한국 입장에서는 충분하냐는 답장이 왔다”며 “이를 토대로 30분∼1시간 안에 패키지 내용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나흘 전에 우리가 감내 가능한 안이라고 했던 것과 거의 비슷하게 됐다”며 “수익 배분 비율 5대 5는 우리가 내건 다른 조건이 있었지만 못 얻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 실장은 이보다 앞선 8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첫 한미 정상회담도 관세협상으로 인해 무산 위기까지 갔다고 회고했다. 그는 8월 2일 미국 측이 보내온 문서에 대해 “완벽하게 미국 입장에서 쓰인 문서였다”며 “‘안 지켜지면 몰취한다’는 등 모든 표현이 강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국내에서 을사늑약에 빗댄 비판까지 제기됐던 만큼 청와대와 정부 협상팀 모두 고강도 압박을 체감한 상황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때도 이재명 대통령은 후퇴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실장은 “당시에도 이 대통령이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있는 사람이 이긴다며 협상을 지원했다”고 전했다. 미국 측 조건을 수용하기보다 최악의 상황까지 감수하겠다는 배수진을 치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핵 추진 잠수함 협력 조항이 팩트시트에 담기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비화가 나왔다. 김 실장은 “8월 정상회담에서 80∼90%는 논의된 사안인데,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를 핵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으로 오해했다”며 “그래서 이 대통령이 더 명확히 하자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실무적으로 논의했던 내용이 있어 빨리 결론 났다”고 밝혔다. 핵무기 탑재가 아닌 추진체 기술 협력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또 한국 조선소에서 미국 군함을 건조하는 방안을 언급한 조항과 관련해선 “미국 법을 고치지 않아도 미국 대통령이 행정명령으로 예외를 둘 수 있다”고 했다. 미국 국내법과 조선 산업 보호 규정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행정명령을 통한 우회로를 모색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김 실장은 협상 전 과정을 돌아보며 이재명 대통령과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의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이 대통령과 강훈식 비서실장의 역할을 보면서, 행정가들이 대체할 수 없는 종합 판단과 담대함 등 정치인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느꼈다”며 “높은 곳에서 역사와 대화하는 정치의 긍정적 역할을 느꼈다”고 말했다. 정치적 결단과 책임을 전제로 한 정상 차원의 선택이 행정부 관료조직과는 다른 차원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취지다.

 

다만 김 실장은 “이제 역사의 한고비를 넘었고 앞으로도 굽이굽이가 있을 것”이라며 “개운하기보다는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관세협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한미 통상 현안과 안보·경제 연계 문제 등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드러낸 대목이다.

 

한편 김 실장은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과 관련해 시장 과열을 우려했다. 그는 “가격 급등의 모든 상황이 갖춰졌는데 단기적으로 공급이 바로 따라갈 수 없어 응급조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시간을 벌고, 몇 달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며 “필사적으로 관계장관회의를 구성해 주택공급방안을 찾고 있다”고 강조했다. 단기 수요 억제와 중기 공급 확대를 병행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전날 국회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있었던 고성 논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김 실장은 국민의힘 김은혜 의원과의 언쟁을 거론하며 “좀 더 부드럽게 답변하는 훈련을 해야겠다”며 “정치 영역에 들어왔다는 인식을 더 해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책실장으로서 국회와의 소통 방식에 변화를 예고한 셈이다.

 

당시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상황을 제지한 데 대해선 “말려주셔서 고맙다”며 “호통을 친 김병기 운영위원장도 상황을 수습하고 마무리하려 하신 것이라 고맙다”고 했다. 여야가 충돌한 현장에서 대통령실 핵심 참모가 한발 물러난 평가를 내리면서 당분간 국회 운영위와의 긴장 국면은 다소 누그러질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치권 안팎에선 이재명 대통령이 한미 관세협상에서 보여준 강경 기조가 대외 협상력 강화라는 효과를 가져오는 동시에, 국내 경제 불확실성을 키울 위험도 안고 있다는 평가가 교차하고 있다. 여권은 대미 협상에서 얻어낸 200억 달러 상한과 핵 추진 잠수함 협력 등을 외교안보 성과로 부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회는 향후 통상 관련 법안과 부동산 후속 대책을 둘러싸고 다시 치열한 공방을 이어갈 전망이다. 정부는 한미 협상 결과와 10·15 대책 후속 조치를 토대로 추가 보완책을 검토할 예정이며, 야당은 구체적인 이행 계획과 시장 영향 검증에 본격 나설 것으로 보인다.

임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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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김용범#한미관세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