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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처럼 흐린 가을”…정읍 천년 고찰에 잠겨드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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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처럼 흐린 가을”…정읍 천년 고찰에 잠겨드는 산책

신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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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흐린 가을에 사찰이나 누정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여행’ 하면 화창한 날, 북적이는 명소를 떠올렸지만, 이제는 적당히 흐리고 습한 날에 고요한 풍경을 찾아 떠나는 것이 누군가에게 평범한 일상이 됐다.  

 

17일 전라북도 정읍은 25도를 넘나드는 온도와 88%의 습도, 30%의 비 예보와 함께 흐리고 촉촉한 공기를 품었다. 그런 날, 내장산국립공원의 깊숙한 사찰 내장사를 향해 걷는 이들은 단풍을 기다리며, 천년 고찰의 평온에 젖어든다. 숲길 아래로 스치는 바람에 섞인 나무 향과 오랜 역사의 이야기, 봉우리에 둘러싸인 초입에서는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이 놓인다”고 방문객들은 표현했다.  

사진 = 포토코리아(한국관광공사) 정읍
사진 = 포토코리아(한국관광공사) 정읍

이런 변화는 숫자 너머 감성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데이터로는 잡히지 않지만, SNS에는 ‘흐린 날의 사찰 산책’, ‘비 오는 날 누정 감상기’ 같은 감상글이 꾸준히 포스팅된다. 또한, 내장사와 함께 정읍사의 배경이 된 정읍사문화공원, 조선시대 보물 누정 피향정 역시 최근 조용한 명상과 사색을 원하는 사람들이 천천히 찾아간다. 공원에 세워진 망부석과 시비, 자연 안에 놓인 조형물은 굳이 목적이 없어도 발길을 이끈다.  

 

지역 문화해설사 신지연씨는 “내장산이나 피향정 같은 역사 공간의 본질은 일상을 잠시 멈추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에 있다. 여유를 깊게 느끼려면 오히려 쓸쓸한 계절, 흐린 날의 풍경이 더 잘 어울린다”고 진단했다. 정읍사문화공원의 넓은 산책로와 피향정의 고즈넉한 누정 옆 연못은 실제로도 평일 오후면 한두 명씩, 사색과 위로를 길어 올리는 사람들이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커뮤니티 곳곳의 반응도 흥미롭다. “차분해지는 느낌이 좋아 혼자 산책을 자주 간다”, “내장사에 앉아 있으면 복잡한 마음이 정돈된다”, “돌이 된 여인 앞에서 괜히 오래 서 있었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과거 선비들이 여유를 나누던 피향정에서도 번잡한 일상을 두고 자연에 안기는 경험을 공유한 이들이 많았다.  

 

작고 사소한 변화지만, 그 안엔 달라진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풍경과 역사, 지나간 이야기가 만나 잠시 천천히 걸으며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새로운 삶의 리듬이 되고 있다. 흐린 가을, 정읍의 유서 깊은 풍경 속을 거니는 일이 단지 ‘여행’이 아니라 나를 위한 문장이 되고 있다.

신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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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내장사#피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