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바다 위를 걷다”…동해가 전하는 느린 여행의 온기
여행지는 언제나 화창할 필요가 없다. 바람이 서늘하게 스쳐 가고, 흐린 하늘 아래 바다가 고요히 일렁이는 풍경을 찾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예전엔 맑은 날만이 여행의 완성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어스름하고 촉촉한 날씨조차 새로운 설렘이 된다.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의 풍경은 바로 이런 변화 속에 있다. 24도가 살짝 넘는 온도, 87%의 높은 습도와 60%대의 강수확률, 그리고 북풍이 남기는 바닷가의 선선함. 그만큼 동해만의 계절과 시간이 짙어진다. 여기에 SNS에는 흐린 바다를 배경 삼아 산책하는 이들의 사진과 인증샷이 잇따른다. “오늘은 파도 소리에 마음을 놓아요”, “비 예보라 더 좋다”는 감성적인 후기들이 이어진다.

숫자로도 동해의 다채로움이 확인된다. 동해시가 품은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는 해안선을 따라 드리워진 산책로와 스카이워크, 그리고 바다를 한껏 품에 안은 카페와 포토존으로 여행객의 사랑을 받는다. 한국관광100선에 선정된 이곳은 비 오는 날, 바다 위에 펼쳐진 유리 바닥에 빗방울이 맺힐 때 더욱 드라마틱하다. 관광객 이지윤(34)씨는 “미세하게 흐린 공기가 오히려 바다와 더 잘 어울린다”며 “걷다 보면 스스로도 차분해진다”는 감상을 털어놓는다.
묵호항에서는 또 다른 삶의 풍경을 만난다. 1947년 개항장 지정 이후 오랜 세월 쌓아온 어시장과 신선한 해산물, 갈매기 소리가 일상의 분주함을 잊게 한다. 해가 비치지 않는 날에도, 물안개와 조용한 파도가 오래된 항구만의 정취를 더한다. 여행객들은 “흐린 날씨라서 더 한산하고 어시장 산책이 여유롭다”고 표현했다.
동해는 바다만이 아니다. 4~5억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천곡황금박쥐동굴 또한 흐린 날 여정에 안성맞춤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차가운 공기와 신비로운 동굴 생성물, 천장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 감각을 깨운다. 가족 단위 탐방객 조민재(41)씨는 “연휴마다 찾았던 바닷가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라며 “자연에 품은 시간의 길이를 처음 실감했다”고 느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느린 여행’이라고 부른다. 조급하게 유명 여행지를 찍는 대신, 흐르는 시간을 오롯이 감각하며 나만의 속도로 걸어보는 방식이다. 동해처럼 계절과 바람, 습도가 촉촉이 깃든 날에는 오히려 사색과 쉼, 일상에서 벗어난 여백이 더 커진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맑은 날만 찾다가 올해는 일부러 흐린 동해를 간다”, “쇠고기보다 푸짐한 오징어회에 소주 한 잔, 바다가 주는 위로”라며 평범한 소확행에 대한 공감이 이어진다.
작고 사소한 변화이지만, 여행의 결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맑음과 흐림, 빛과 구름이 공존하는 동해의 풍경은 단지 날씨가 아니라, 일상에 여유를 더하는 새로운 여행의 기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