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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고속도로는 통신망”…정부, AI-RAN로 6G 주도권 노린다

박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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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국가 경쟁력이 연산 능력뿐 아니라 통신 인프라에 좌우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정부가 내세운 AI 고속도로 구상의 핵심이 결국 네트워크라는 분석이 나온다. 생성형 AI를 넘어 로봇과 산업 설비를 직접 제어하는 피지컬 AI 시대로 갈수록 데이터 지연이 곧 안전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통신망 자체를 지능형 인프라로 바꾸는 전략이 부상하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전략이 AI 연산 인프라 경쟁에서 네트워크 지능화 경쟁으로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최근 국가 네트워크 종합 로드맵인 하이퍼 AI 네트워크 전략을 발표하며 통신망 중심의 AI 인프라 구상을 제시했다. 정영길 과기정통부 네트워크정책과장은 GPU와 데이터센터보다 이를 받쳐주는 통신망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통신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AI 확산으로 폭증하는 트래픽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는 6세대 이동통신, 6G 경쟁력의 축을 단순 속도가 아닌 지능으로 설정했다. 5G가 대역폭과 속도 등 통신 성능 중심으로 진화했다면, 6G에서는 기지국이 컴퓨팅과 센싱 기능까지 탑재한 지능형 노드로 전환된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5G 단계부터 네트워크 지능화를 선행해 6G 시대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핵심 축은 AI 기반 무선접속망, AI-RAN이다. AI-RAN은 AI로 네트워크를 고효율·저전력 구조로 운영하는 동시에, 기지국에서 AI 연산을 수행하는 엣지 AI 인프라 역할을 수행한다. 단순히 데이터를 전달하는 망을 넘어, 네트워크 자체가 AI 모델을 실행하고 추론에 관여하는 구조로의 전환을 목표로 한다. 정부는 내년부터 본격적인 기술 개발에 착수해 2028년 레벨4 수준의 자동화를 달성하고, 2032년에는 완전 자율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글로벌 통신 시장에서도 공통적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AI-RAN을 차세대 통신 경쟁의 핵심 기술로 보고, 통신망 운영과 기지국 제어에 AI를 결합하는 연구개발과 실증 사업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중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민간 투자와 연계된 AI-RAN 전환 전략이 추진 중이다.

 

이 과정에서 엔비디아가 통신망에 GPU를 탑재하는 접근을 앞세워 AI-RAN 생태계 확산에 나섰다. 기존 데이터센터 중심 AI 연산을 무선망 기지국과 코어망으로 분산시키는 구조다. 엔비디아는 삼성전자,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한국 통신·IT 기업들과도 AI-RAN 협력 체계를 구축해 5G와 차세대 네트워크에서의 연산 오프로드와 지능형 제어 기술을 공동 개발 중이다.

 

피지컬 AI 확산은 AI-RAN 필요성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피지컬 AI는 대용량 데이터 처리와 동시에 로봇, 자율주행 설비, 스마트 팩토리 장비 등 실제 물리 세계의 객체를 직접 제어해야 한다. 이때 센서 입력부터 판단, 제어 신호 전송까지의 전 과정이 극도로 짧은 시간 안에 이뤄져야 한다. 판단이 지연되면 충돌, 오작동, 생산 라인 정지 등 안전과 직결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최성호 정보통신기획평가원 PM은 피지컬 AI의 센싱, 판단, 행동 전 과정이 200밀리초 이내에 수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클라우드 데이터센터에만 의존하거나, 각 설비에 온디바이스 방식으로 연산을 태우는 구조만으로는 이러한 시간 제약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상황이다. 기지국이 통신과 연산을 동시에 수행하는 AI-RAN 구조가 적용돼야 초저지연·실시간 처리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AI-RAN 환경에서는 기지국 인근에 탑재된 GPU가 거대 언어모델 수준의 AI를 직접 처리하게 된다. 정부와 업계는 700억 파라미터급 대형 모델도 약 30밀리초 내에 추론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한다. 이 경우 기지국은 로봇과 자율주행 기기들을 제어하는 외장형 두뇌 역할을 하게 된다. 공장, 항만, 물류센터, 도심 교통 인프라 등에 배치된 로봇과 센서들이 주변 기지국을 통해 AI 판단을 공급받는 구조다.

 

국가 백본망 용량 측면에서도 AI-RAN 도입 필요성이 부각된다. 정부는 국내 백본망이 2029년 이후 한계에 다다를 것으로 보고, 2030년 전후로 현재의 약 4배 수준으로 확충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대규모 AI 연산 트래픽과 피지컬 AI가 요구하는 초정밀·실시간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려면 기존 방식의 전송망 증설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기지국 단계에서 연산과 지능을 병합한 AI-RAN으로의 구조 전환이 불가피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은 AI-RAN 구축에서 구조적 이점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해외에서는 기지국별로 통신 처리 장비가 분산 배치된 경우가 많아, 각 기지국마다 GPU를 장착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여러 기지국의 기능을 국사나 집중국에 모아 처리하는 중앙집중형 아키텍처를 이미 구축해 두었다. 이 때문에 연산 자원을 집중국 단위로 배치하면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투자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국내에서는 약 10만 개 수준의 기지국 안테나가 200여 개 집중 국사로 연결된 구조다. 최 PM은 이러한 구조 덕분에 소수의 국사에만 GPU를 집적해도 전국적인 AI-RAN망 구현이 가능하다고 분석한다. 비용과 전력, 유지보수 부담을 줄이면서도 AI 연산이 가능한 지능형 기지국 네트워크를 비교적 신속히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정부는 이 같은 기술적·구조적 조건을 바탕으로 AI-RAN을 6G 시대 국가 핵심 인프라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2026년부터 본격적인 AI-RAN 기술 개발과 선제적 실증에 들어가고, 2030년까지 전국 산업·서비스 거점에 6G 기반 AI-RAN을 500개 이상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제조, 물류, 에너지, 교통, 국방 등 주요 분야의 거점 인프라에 지능형 기지국을 배치해 피지컬 AI 도입을 촉진하겠다는 구상이다.

 

향후 과제로는 통신 장비 국산화와 AI 칩, 소프트웨어 스택 자립도 이슈가 거론된다. 엔비디아 의존도가 높은 현 구조에서 탈피해 국내 반도체 업체와 스타트업이 참여하는 개방형 생태계를 어떻게 설계할지에 따라 산업 파급력이 달라질 수 있다. 동시에 AI-RAN에서 처리되는 데이터가 개인 위치, 행동 패턴 등 민감 정보를 포함하는 만큼 통신 비밀 보호와 개인정보 규제에도 세심한 설계가 요구된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AI 고속도로 전략이 실제로 피지컬 AI 상용화를 견인하려면 통신 인프라 투자, 클라우드·단말·네트워크 간 기능 분담, 보안·윤리 규범 정비가 함께 추진돼야 한다고 본다. 산업계는 통신망이 단순 전송 인프라를 넘어 지능형 AI 실행 기반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 향후 정책 방향과 민간 투자의 속도를 주시하고 있다.

박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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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엔비디아#ai-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