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동결 러시아 자산 담보 대출 반대”…벨기에 유로클리어 경고에 EU 우크라 지원 구상 흔들려

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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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기준 26일, 벨기에(Belgium) 브뤼셀에서 유럽연합(EU)의 러시아 동결자산을 담보로 한 우크라이나 ‘배상금 대출’ 구상을 둘러싸고 핵심 금융기관의 제동이 공개됐다. EU 내 최대 러시아 자산 보관기관인 유로클리어(Euroclear)가 강한 우려를 공식 표명하면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과 유럽 금융시장 안정성 사이의 긴장 관계가 부각되고 있다.

 

영국(UK)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발베리 위르뱅 유로클리어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러시아 동결자산을 활용한 무이자 ‘배상금 대출’ 계획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현지시각 기준 26일 공개된 이 서한에서 유로클리어는 해당 구상이 유럽 금융시장의 매력도와 투자 환경을 손상시키고, 장기적으로 유로존 회원국 전반의 차입 비용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벨기에 ‘유로클리어’, EU 러시아 동결자산 담보 대출에 반대…“유럽 국채 스프레드 상승 우려”
벨기에 ‘유로클리어’, EU 러시아 동결자산 담보 대출에 반대…“유럽 국채 스프레드 상승 우려”

유로클리어는 현재 EU가 동결한 러시아 국유 자산 가운데 약 1천850억 유로 규모를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U 전체 동결 규모는 약 2천100억 유로에 달하며, 집행위는 이 가운데 일부를 활용해 향후 2년간 우크라이나에 1천400억 유로 상당을 무이자 대출 형태로 제공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유로클리어는 자신들이 강제로 참여하게 되는 맞춤형 무이자 대출 상품이 사실상 러시아 자산의 몰수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서한에서 유로클리어 측은 특히 국부펀드와 중앙은행 등 주요 공적 투자자들이 러시아 동결자산 활용을 “중앙은행 자금 몰수”로 간주할 위험을 강조했다. 이 같은 인식이 확산될 경우 유럽의 법치주의 신뢰가 훼손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며, 그 결과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위험 프리미엄이 확대돼 유럽 국채 스프레드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로존 회원국의 국채 금리가 동반 상승하면 역내 차입 비용 전반이 구조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담겼다.

 

유로클리어는 러시아의 대응에도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러시아가 ‘배상금 대출’을 자국 자산의 사실상 몰수 조치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고, 이에 따라 구체적인 보복 조치와 장기적인 법적 분쟁이 뒤따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유로클리어는 자신들이 관리하는 자산이 강제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에 동원될 경우 러시아가 이를 정식 몰수로 규정할 것이라고 내다보며, 그 파장이 EU 회원국 재정에까지 미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서한에서 유로클리어는 러시아의 보복과 분쟁이 현실화될 경우 EU 회원국이 유로클리어에 대한 재정적 보상 책임을 부담하게 될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 과정에서 각 회원국 재정에 추가적 부담이 발생할 수 있으며, 동결자산 활용이 단기적인 우크라이나 지원 재원 확보에는 도움이 되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역내 재정 리스크를 키우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위르뱅 CEO는 따라서 법적 위험이 해소되지 않는 한 ‘배상금 대출’이 실제 시행되려면 EU 차원의 무조건적 보증이 선행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이는 유로클리어가 러시아 측의 소송이나 보복 조치에 직면할 경우, 그 비용을 EU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요구로 해석된다. 유로클리어의 입장은 러시아 동결자산 활용과 관련된 법적·정치적 위험을 개별 금융기관이 감내할 수 없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유로클리어의 이번 서한이 벨기에 정치권의 우려를 상당 부분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바르트 더베버르 벨기에 총리는 그동안 러시아의 보복과 관련 손실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문제 삼으며 동결자산을 우크라이나 ‘배상금 대출’ 재원으로 활용하는 구상에 신중한 태도를 고수해 왔다. 주요 자산의 상당 부분이 벨기에에 소재한 상황에서 향후 법적 공방이 자국 재정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배경으로 거론된다.

 

EU 집행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대규모 동결자산을 새로운 형태의 전쟁 배상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우크라이나 재건 지원과 전쟁 피해 보상을 명분으로 내세운 ‘배상금 대출’ 구상은, 기존 국제법과 금융 관행에 도전하는 성격 때문에 유럽 내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 각국 중앙은행 자산의 불가침 원칙과 국제 금융 시스템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돼 온 상황이다.

 

유로클리어의 공개적인 반대 속에 ‘배상금 대출’ 추진 속도는 눈에 띄게 둔화됐다. 벨기에 정부가 러시아 보복 위험과 이에 따른 재정 부담 가능성을 이유로 끝까지 반대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 EU 차원의 합의 도출이 난항을 겪는 모습이다. 유럽 금융시장의 안정과 법적 정합성을 중시하는 회원국과, 러시아에 보다 강한 재정적 대가를 요구해야 한다는 국가 간에 의견 차가 노출돼 있다.

 

이 같은 난관을 의식한 EU 집행위는 최근 러시아 동결자산을 직접 담보로 활용하는 대신, EU가 공동으로 시장에서 자금을 차입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동시에 개별 회원국이 양자 관계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보조금을 제공하는 등 보다 분산된 재원 조달 시나리오도 논의 대상에 올라 있다. 동결자산의 직접적 전용 대신 그 이자 수익만을 활용하는 절충 방안도 EU 내부에서 거론돼 왔다.

 

국제 금융시장은 EU의 결정이 중앙은행 자산 보호 원칙에 어떤 선례를 남길지 주목하고 있다. 러시아 동결자산을 둘러싼 논쟁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제재를 외교 수단으로 활용해 온 서방의 전략과, 글로벌 금융 규범 사이의 충돌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유로클리어의 경고 속에서 EU가 어느 수준에서 타협점을 찾을지, 그리고 그 선택이 향후 국제 금융질서와 전쟁 배상 관행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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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클리어#eu#러시아동결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