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정책 근거 부족 논란…대전협, 교육여건 개선 촉구
의사 인력 확충이 디지털 헬스·정밀의료 시대의 기반 인프라로 꼽히는 가운데, 윤석열 정부가 강행한 의과대학 정원 2000명 증원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감사원이 “전국 총량 기준에서 의사 수 부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취지의 감사 결과를 내놓자, 전공의 단체가 즉각 환영 입장을 밝히며 교육 인프라와 거버넌스 전면 재정비를 요구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의료 인력 정책과 의료 교육 체계, 나아가 디지털 헬스케어 전략 전반을 재점검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27일 입장문을 통해 “비합리적이고 폭압적이었던 지난 정권의 의대 정원 증원 과정에 대해 논리적 정합성 부족과 절차적 정당성 미흡을 지적한 감사 결과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이날 발표에서 정부가 의대 증원 규모를 정하는 과정에서 활용한 의사 수급 추계가 지역 간 의사 불균형을 보여주는 수준에 그쳤으며, 이를 곧바로 전국 총량 부족으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논리 구조가 허술한 수요 예측을 바탕으로 전국 단위 정원 확대가 결정됐다는 지적이다.

대전협은 정책 결정의 절차적 흠결이 단순 행정 개선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전공의들은 “지난 1년 반 동안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절망해 수련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며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절차가 부재했고,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심의의 절차적 정당성마저 확보되지 못했다는 점이 사태의 핵심 원인”이라고 짚었다. 특히 의료 인력 정책이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 진단, 바이오 연구 인력 수급과 직결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교육과 수련 현장의 의견이 배제됐다는 비판이다.
전공의 단체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거버넌스 구축을 요구했다. 대전협은 “현장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정책 설계 단계에서부터 의사단체, 수련병원, 의과대학, 환자단체가 참여하는 상시 협의체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의료 인력은 병원 진료뿐 아니라 임상 데이터 생성, 의학 AI 검증, 의료기기 임상시험 등 IT·바이오 융합 산업의 기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투명한 규제 환경과 불안정한 수련 구조가 장기적으로 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깔려 있다.
교육 인프라 문제도 정면으로 제기됐다. 대전협은 “증원과 함께 약속했던 강의실과 실습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며 “대학별 학생 수용 역량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일관성 없는 배정 기준을 적용한 결과, 선발된 학생들은 공간이 부족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어야 하는 처지”라고 지적했다. 이어 “앞으로 6년간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이 이어질까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이는 의료 인력 양적 확대에만 초점을 맞춘 결과, 임상 술기 교육, 시뮬레이션 실습, 디지털 의료 장비 활용 교육 등 질적 요소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비판으로 해석된다.
대전협은 의대 교육의 질이 곧 한국 의료의 미래와 직결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의과대학 학생들이 적절한 환경에서 충분한 교육을 받고 역량 있는 의사로 성장하는 것은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며 “학생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고 졸업 후 적절한 수련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 부처의 책임 있는 조치를 강력히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교육 인프라가 부족한 상태에서 학생 수만 늘어날 경우, 의료 현장에서 숙련도 편차가 커지고, 첨단 의료기술 도입 시 안전성 검증과 표준 진료 지침 수립에도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감사원의 판단은 정부의 의사 수급 전략 전반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감사원은 “현재 부족한 의사 수를 산출한 연구는 지역 간 의사 수급 불균형을 나타낸 것으로, 전국 총량 측면에서 부족한 의사 수로 보기는 어렵다”고 명시했다. 의료 취약지 해소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면 단순 정원 확대보다 지역별 수련 인프라 확충, 공공병원 기능 강화, 원격의료와 디지털 헬스 인프라 구축 등 복합적 접근이 요구된다는 해석이 나온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의사 인력 정책과 디지털 헬스 전략이 결합되는 추세가 뚜렷하다. 미국과 유럽은 지역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원격진료와 인공지능 기반 진단 보조 시스템, 전자의무기록 표준화 등을 병행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의대 정원 증원 논쟁이 정치·사회 갈등으로 비화되면서, 정작 데이터 기반 수급 예측 모델 고도화와, 디지털 헬스 인력 재교육 체계 설계는 뒷순위로 밀려 있다는 지적이 의료계 안팎에서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감사 결과가 의료 인력 정책을 데이터 기반 장기 전략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본다. 인구 구조 변화, 지역별 진료 패턴, 원격의료 도입 수준, AI 활용도 등 변수를 반영한 정교한 수급 모델과, 그에 맞춘 교육·수련 인프라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산업계에서는 “의료 인력 확충 논쟁이 양적 확대를 넘어, 어떤 역량을 가진 의료 인력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옮겨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의료계와 IT·바이오 업계는 이번 감사 결과를 계기로 정부가 의료 인력 정책과 디지털 헬스 전략을 통합해 재정비할지 주시하고 있다. 의료 현장의 신뢰를 회복하고 교육 인프라를 보완하지 못할 경우, 정원 확대가 의료 대란 재연과 산업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결국 의료 인력 정책과 교육, 디지털 헬스 인프라, 거버넌스 개편을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한국 의료와 바이오 산업의 향후 성장을 가를 분수령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