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바이오

“과학기술유공자 95명 시대”…IT 바이오 성장 밑거름 재조명

신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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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과학기술의 뿌리를 다져온 개척자들이 공식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정보통신과 바이오, 방산·우주, 정밀의료 분야로 확장된 오늘의 IT 바이오 산업은 수십 년 전 기초·응용 연구에 투자했던 과학기술인들의 축적된 성과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정부가 과학기술유공자를 추가로 지정하면서, 1960년대 방사선 계측과 생물학 제도화, 1980년대 항공전자와 초음파 진단기기 개발 등 과거의 원천기술이 현재 디지털 헬스케어·우주 발사체·정밀의료 산업으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이 모인다. 산업계는 이러한 역사적 자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다음 세대 연구와 창업으로 연결하는 정책 방향에 주목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9일 고 권영대 서울대 명예교수, 고 강영선 서울대 명예교수, 이경서 단암시스템즈 회장, 고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등 4명을 과학기술유공자로 신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들 4인을 포함해 지금까지 지정된 과학기술유공자는 총 95명이다. 자연과학, 생명과학, 공학, 융합 분야에 걸친 장기 연구와 국가 과학기술 발전 기여도가 핵심 평가 기준이 됐다.

물리학자 고 권영대 교수는 국내 우주 방사선 연구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방사능 측정기를 직접 제작해 실제 우주 방사선 환경을 계측하는 기술 기반을 닦았고, 1960년대 초기형 입자가속기인 1MeV 싸이클로트론을 완성해 양성자 빔 인출에 성공했다. 당시 가속기 기술은 고에너지 물리학과 방사선 의학, 반도체 재료 분석 등 다수의 첨단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국가 전략 인프라였다. 현재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와 진단에 사용되는 장비, 우주 방사선이 인공위성 전자장비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시뮬레이션 기술 등도 기본적으로 정밀 계측과 빔 제어 기술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권 교수의 역할이 토대가 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생물학자 고 강영선 교수는 해방 이후 국내 생명과학 연구 체계를 세운 1세대로 꼽힌다. 서울대 생물학과 설립을 주도하며 동물학, 세포학, 유전학, 발생학 등 기초 생물학 전 분야의 교육·연구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이후 분자생물학, 유전체 연구, 바이오의약품 개발 등으로 이어지는 인력 양성의 출발점이 됐다. 국제생물학사업 한국지부 설립을 통해 한국 생물학계가 국제 협력 네트워크에 편입되는 계기도 마련했다. 동시에 국립공원 설립운동, 비무장지대 생태평화공원 개념 정립 등 자연환경 보존 활동에 나서며 생태계 보전과 과학 연구를 연계한 점도 특징이다. 오늘날 생물다양성 데이터, 생태 모니터링를 활용한 환경 빅데이터 분석과 생태 기반 헬스케어 연구가 확대되는 가운데, 강 교수의 제도적·사상적 유산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엔지니어 이경서 회장은 우리나라 미사일과 발사체 기술 발전의 핵심 인물로 평가된다. 국내 최초 탄도미사일 백곰 개발사업의 연구총괄책임자로서 고체로켓 추진기관과 관성항법장치 핵심기술 연구를 이끌었다. 고체로켓 추진기관은 장기간 저장과 신속 발사가 가능해 군사·우주 분야에서 중요한 기술이고, 관성항법장치는 GPS가 차단되거나 교란될 때도 스스로 위치를 계산해 항법을 유지하는 시스템이다. 1985년 설립한 단암전자통신에서는 원격 비행데이터 수신기술, 무선 데이터 통신, 전파 방해 대응 GPS 등 항공전자 장치를 개발했다. 이러한 기술은 현대적으로 보면 드론, 저궤도 위성, 우주발사체, 유무인 복합체계 등 디지털 방산과 우주산업의 기반 기술로 확장 가능한 분야다. 국내에서 항공우주와 방산 전자장비 내재화가 전략 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이 회장의 축적된 기술 자산과 인력 양성 효과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고 이민화 명예회장은 의료 IT와 벤처 생태계 양쪽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초음파 진단기기 영상신호처리와 센서 기술 연구를 토대로 1980년 국산 초음파진단기를 처음 개발했고, 이를 바탕으로 1세대 벤처기업 메디슨을 창업했다.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변환해 실시간 의료 영상을 구현하는 기술, 탐촉자 센서의 정밀 제어 기술 등은 오늘날 클라우드 기반 의료 영상 관제, 인공지능 영상 판독, 원격 진단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의료 IT 산업의 근간이 되는 분야다. 이후 벤처기업협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으며 벤처특별법 제정, 실험실 창업 제도, 기술거래소, 스톡옵션 도입 등을 주도해 창업자 친화적 제도 환경 조성에 기여했다. 현재 AI 의료기기, 디지털 치료제, 바이오 스타트업 생태계가 성장하는 배경에는 당시 도입된 벤처·기술금융 제도가 자리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과학기술유공자 제도는 과학기술인의 공적을 국가가 공식 인정하고 장기적으로 예우·지원함으로써 과학기술인이 존중받는 사회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단순한 포상 차원을 넘어 업적과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기록·보존하고, 교육·전시·콘텐츠로 재구성해 후속 세대가 연구 방향과 산업 전략 수립에 참고하도록 하는 기능을 포함한다. 과기정통부는 물리학, 생명과학, 엔지니어링, 융합진흥 분야 전문가 140명이 참여한 심사위원단을 구성해 학문적 성과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 발전 기여도, 산업·정책 파급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했다. 후보자는 국민 추천과 기관·전문가 추천을 통해 발굴했다.

 

정부는 유공자 선정과 함께 현장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소통도 병행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은 이날 과학기술유공자 9명을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열고 국가 과학기술 발전과 과학기술인 처우 개선 방향을 논의했다. 간담회에는 조완규 서울대 전 총장, 민계식 현대중공업 전 회장, 권욱현 서울대 명예교수, 이충구 현대자동차 전 사장, 김명자 KAIST 이사장, 한문희 생명연 초대원장, 박성현 서울대 명예교수, 채영복 원정연구원 이사장, 이경서 단암시스템즈 회장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산업 구조 변화 속에서 기초연구와 인력 양성의 중요성, 지속 가능한 연구비 지원,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위상 강화 등을 놓고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배 장관은 과학기술유공자의 업적이 대한민국을 과학기술 강국으로 만드는 중요한 기초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이정표라고 강조하며, 과학기술인의 업적 발굴과 보존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IT 바이오 융합 기술, 반도체·우주·디지털 헬스케어 등 신산업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산업계는 이번 유공자 지정을 계기로 과거 원천기술과 오늘의 혁신을 연결하는 장기 전략이 강화될지 주시하고 있다.

신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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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유공자#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