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는 관리질환”…레드 마침표, 차별 해소로 치료 패러다임 전환
HIV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줄이는 움직임이 과학기술 기반의 치료·예방 환경 변화와 맞물리며 확산되고 있다.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와 예방요법 도입으로 감염인의 수명과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됐지만, 사회적 낙인과 낮은 인식은 여전히 기술 발전의 효과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남아 있다. 학계와 환자단체, 글로벌 제약사가 한자리에 모여 인식 개선에 나선 배경에는, 질환을 만성질환으로 관리하는 정밀의료 패러다임을 실제 사회 시스템에 안착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학계, 환자단체, 산업계가 공동 참여하는 레드 마침표 협의체는 17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레드 마침표 캠페인 시민 참여 행사를 열고 HIV 차별과 편견 종식을 위한 대중 소통에 나섰다. 협의체는 세계 에이즈의 날을 계기로, HIV 감염인이 자신의 상태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감염 위험이 아닌 사회적 배제와 차별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실제로 국내외 연구에서는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를 꾸준히 이어갈 경우 바이러스량이 검출 한계 이하로 떨어져 타인에게 전파될 위험이 크게 낮아지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HIV 치료 기술은 지난 40여 년 동안 급속히 발전했다. 과거에는 다수의 약제를 시간대별로 복용해야 했지만, 현재는 성분을 결합한 복합제와 장기지속형 제형이 보급되면서 복약 편의성이 크게 개선됐다. 정기적인 치료와 모니터링만으로 혈압·혈당 관리처럼 바이러스 억제가 가능해지면서, HIV는 당뇨병과 고혈압에 준하는 관리 중심의 만성질환으로 분류되는 추세다. 그러나 국내 감염인 상당수는 직장, 의료기관, 지역사회에서 경험하는 낙인 때문에 정기 진료를 중단하거나, 초기 검사를 미루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치료 기술의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캠페인은 디지털 플랫폼과 오프라인 참여를 연계한 점이 특징으로 평가된다. 협의체는 10월부터 네이버 해피빈 굿액션 페이지를 운영하며 시민들의 온라인 응원 메시지를 수집했고, 청계광장 행사에서 이 내용을 함께 낭독해 참여 경험을 확장했다. 전문가들은 온라인 게시글, 영상, 인터랙티브 콘텐츠가 질환 정보 접근성을 높이는 비대면 헬스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HIV처럼 낙인이 강한 질환에서는 여전히 직접적인 공감과 연대의 장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현장에서는 예술·대중문화 콘텐츠를 활용해 질환 인식 개선을 시도했다. 김소영 작가는 레드 마침표 캠페인의 핵심 메시지를 캘리그래피 공연 형식으로 구현했고, 감염인의 시선에서 본 캠페인의 의미를 전하는 스토리 영상과 배우들의 응원 영상도 상영됐다. 가수 손승연이 희망과 위로를 주제로 공연을 진행하면서, 의료·제약 중심의 질환 담론을 일상 언어로 전환하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문화 콘텐츠와 디지털 플랫폼이 결합될 경우, 질환에 대한 공포를 줄이고 치료·예방 정보 전달력을 높이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연구·의료 현장의 시각도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국립중앙의료원 감염내과 진범식 교수는 HIV를 치명적인 급성 감염병이 아닌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규정하며, 치료 성과에 비해 감염인의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되지 못한 배경에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계에서는 만성질환 관리 모형과 연계한 장기 추적 관리, 정신건강 지원, 디지털 헬스케어 도구를 통한 복약 관리 등이 병행돼야 치료 성과가 현실의 건강지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글로벌 제약사도 감염 종식 목표를 인식 개선과 연결 짓는 전략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항바이러스제 개발과 공급에 참여해 온 길리어드 코리아는 레드 마침표 캠페인이 신규 감염인 감소와 HIV 감염 종식을 앞당기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하며, 연구개발과 더불어 인식 개선 활동에도 투자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장기지속형 예방 주사와 경구 예방요법 등 예방 중심 포트폴리오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조기 검사와 치료로 연결되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감염 종식 로드맵이 지연될 수 있다고 본다.
전 세계적으로는 HIV를 둘러싼 정책·규제 환경도 변곡점을 맞고 있다. 각국 보건당국은 치료 기술 접근성 확대, 감염인의 개인정보 보호, 직장·보험·의료서비스 영역에서의 차별 금지 정책을 병행하며 공중보건 전략을 고도화하는 흐름이다. 반면 일부 국가는 질환 특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보다 도덕적 잣대에 기반한 규제가 유지돼, 검진률과 치료 연계율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신약과 정밀진단 기술뿐 아니라, 차별 해소와 인권 보호 정책이 결합될 때 비로소 HIV가 통제 가능한 감염성 만성질환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와 의료계는 레드 마침표 캠페인과 같은 민관 협력형 인식 개선 활동이 확산될 경우, 조기 검진과 치료 유지율이 높아져 중장기적으로는 의료비 부담과 신규 감염 규모를 동시에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 감염병 전문가는 HIV를 둘러싼 사회·제도 환경이 치료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가 향후 감염 종식 전략의 관건이 될 것이라며, 기술과 윤리, 인권과 제도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새로운 공중보건 패러다임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계는 이번 캠페인이 실질적 정책 변화와 의료 현장 개선으로 이어질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