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억 투입 국산 VR엔진, 기존 기술 재활용”…ETRI 사업평가 관리감독 도마 위
국가 연구개발 예산 357억원이 투입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국산 VR 엔진 및 저작도구 개발사업이 기존 민간기술을 신기술로 포장해 ‘택갈이’했다는 국회 지적이 제기됐다. 사업을 관리·감독한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은 이 같은 정황을 적발하지 못한 채 해당 사업을 '성공'으로 평가했다는 점에서 연구개발 사업 관리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업계는 이번 감사결과가 향후 국가 IT R&D 투자 및 평가절차 전반의 신뢰성 논란으로 번질 수 있는 중대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번 논란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최수진 국민의힘 의원이 24일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종합감사자료 및 IITP 최종평가위원회 종합의견서를 분석해 제기한 데서 비롯됐다.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진행된 해당 사업은 가상현실(VR) 콘텐츠 제작 도구 국내 기술 자립을 목표로 추진됐으며, 사업비 총액은 357억원에 달한다. 그런데 최근 NST 감사에서 ETRI가 기존 상용 도구를 신개발한 것처럼 포장한 의혹이 드러났고, 후속 사업에도 외산 VR 솔루션을 활용한 기업이 뇌물을 제공해 추가 과제를 따낸 정황이 파악됐다.

문제의 핵심은 IITP의 관리감독 미흡에 있다. IITP는 두 차례 최종평가에서 기술계획 대비 실적이 '보통' 이상이라며 성공 판정을 내렸다. 평가위원 개별평가지 및 종합의견서에서는 "사업을 성실히 수행해 목표를 달성했다"며 평균 80점 이상의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 다만 IITP는 "최종평가 점수는 77점 수준이며, 규정상 특이사항이 없어 사업 성공으로 평가했다"고 해명했다. 사업평가 규정은 목표 달성도, 기술성, 경제성, 사업성 기준에 초점을 맞춘다.
ETRI 사업의 세부내용을 살펴보면, 종합심의위원회 자료에는 '실시간 분산처리 엔진' 등이 기술적 차별점으로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실제 신기술 개발이 아닌 기존 엔진 재활용이 의혹으로 제기된 상황이다. IITP는 “종합심의위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했으나, 사업평가 과정의 투명성과 책임성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특히 이번 감사에서 외산 VR 솔루션을 사용한 일부 기업이 과제 수주 과정에서 뇌물을 제공한 정황도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ETRI는 지난 7월 감사 재심의를 NST에 신청했다. IITP 역시 결과에 따라 연구윤리위원회를 운영, 연구부정 확정 시 국가연구개발혁신법에 의거한 환수·제재 절차에 착수한다는 방침이다.
국내 IT R&D 평가 및 최종심의 절차의 공정성은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한 기초로 꼽힌다. 미국, 유럽, 일본 등도 공공 연구개발사업 관리 투명성 확립과 사후 감사 강화를 병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연구비 투입 효과 극대화를 위해 국내 심의·평가 시스템의 사전검증 강화와 평가위원회 구성 투명성이 제도적으로 요구된다”고 진단했다.
산업계는 “연구기관의 도덕적 해이와 관리감독 기관의 책임성 부재가 맞물릴 경우, 혁신 기술 생태계 신뢰도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실제 시장 적용과 산업 발전에 바람직한 R&D 투명성 강화 방안을 촉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