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억달러 비만약 시대”…GLP1 혁신, 대사질환 치료 축 바꾼다
비만 치료제가 대사질환 치료 패러다임을 뒤흔들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비만 치료제 매출은 처음으로 300억달러를 돌파하며 전환점을 맞았다. 업계는 GLP1 계열 약물이 단순 체중 감량을 넘어 심혈관·대사질환 관리의 핵심 축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본다. 생산능력 확충과 파이프라인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업계 일각에서는 2030년 이후 시장 규모가 2000억달러를 넘는 초대형 플랫폼으로 재편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비급여 부담과 장기 복용 순응도, 건강보험 재정과 형평성 문제는 향후 사업성과 정책 논의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16일 발간한 NEXT PHARMA KOREA 리포트에서 정수용 아이큐비아 대표는 비만 치료제 혁신과 글로벌 시장의 미래를 분석했다. 정 대표에 따르면 글로벌 비만 치료제 시장은 2024년부터 2028년까지 연평균 24~27%의 고성장을 이어가며 2028년 기준 740억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치료 지침이 확대돼 처방 대상과 기간이 넓어질 경우 같은 해 1310억달러까지 커질 여지도 언급했다. 그는 2030년 이후에는 비만 치료제가 2000억달러를 웃도는 초대형 시장으로 재편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현재 시장은 노보노디스크의 위고비와 일라이릴리의 마운자로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두 제품 모두 GLP1이라 불리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 1’ 호르몬을 기반으로 한다. GLP1은 식후에 분비돼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고 식욕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를 약물로 모방하거나 강화해 혈당 조절과 체중 감소 효과를 동시에 노리는 방식이다. 위고비와 마운자로는 체중 감량 효과와 심혈관·대사질환 개선 데이터를 앞세워 글로벌 처방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다.
특히 이번 GLP1 혁신은 기존 생활습관 교정과 수술 중심 비만 치료의 한계를 크게 줄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시장 리더인 노보노디스크와 일라이릴리는 수십억달러 규모의 생산 설비 투자를 단행하며 공급 병목 해소에 나서는 한편, 원료·제조·유통을 아우르는 대규모 인수합병을 통해 공급망을 공고히 하고 있다. 글로벌 생산능력이 확대될수록 가격 구조와 보험 등재 전략이 다시 조정될 수 있어, 후속 기업들의 진입 환경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개발 파이프라인도 과열 수준으로 늘고 있다. 정 대표에 따르면 2024년 1월 기준 임상 개발 단계에 들어간 비만 치료제 후보물질만 173개에 달하며, 이 가운데 8개는 이미 시장에 출시됐다. 전체 파이프라인의 약 47%가 여전히 임상 1상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후보 물질 수 자체와 작용 기전의 다양성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높다. 업계에서는 특정 몇 개의 블록버스터 의존 구조에서 다중 기전·다중 적응증을 겨냥한 포트폴리오 전략으로 옮겨가는 흐름으로 보고 있다.
정 대표가 꼽은 비만약 개발의 핵심 트렌드는 세 가지다. 첫째, 체중 감량 속도와 절대 감량 폭을 끌어올리는 방향이다. 기존 약물 대비 더 짧은 기간에 체지방을 크게 줄이는 데이터 경쟁이 본격화된 모습이다. 둘째, 복용 편의성을 높이는 제형 혁신이다. 주사제 투약 간격이 주 단위에서 격주 또는 월 단위로 늘어나고, 경구용 제형이 본격 등장하면서 환자 순응도 개선이 기대된다. 셋째, 근육량 보존과 체중 유지 치료 전략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단기간 체중 감량보다 장기적인 체성분 관리와 재발 방지가 전체 치료 전략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분위기다.
작용 기전 측면에서도 다중 호르몬 타깃 전략이 넓어지고 있다. 기존 GLP1 단일 타깃에서 GIP, 아밀린 등 다른 대사 관련 호르몬을 함께 조절하는 복합 기전 약물이 대거 파이프라인에 진입했다. GLP1과 GIP를 동시에 자극하면 식욕 억제와 혈당 조절 효과를 강화할 수 있고, 아밀린 계열 약물은 포만감과 위 배출 속도를 조절해 추가적인 체중 감량과 대사 개선을 노린다. 이러한 다중 타깃 전략은 단백질·펩타이드 설계 기술과 제형 기술의 고도화를 전제로 하며, 안전성과 내약성을 확보하는 것이 상용화의 관건으로 꼽힌다.
투약 방식도 빠르게 다변화하는 중이다. 현재 파이프라인에 포함된 후보물질 가운데 피하주사 형태가 95개로 가장 많지만, 경구용 제형 역시 71개에 이른다. 경구용 비만 치료제는 위장 통과를 견디는 제형 설계와 체내 흡수율 확보가 어려워 고난도 기술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약국 조제와 자가 복용이 가능한 형태로 발전할 경우, 비만을 만성질환처럼 장기 관리하는 모델이 보편화될 가능성이 있다. 정 대표는 이러한 변화가 환자의 치료 접근성과 편의성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비만약의 산업적 가치는 적응증 확장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정 대표는 비만 치료제가 체중 감량을 넘어 심혈관계와 대사질환 전반을 다루는 ‘중추 약제’로 진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위고비는 미국 식품의약국과 국내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심혈관 질환 위험 감소 적응증을 추가로 승인받았다. 대규모 임상 연구에서 위고비 투여군은 위약 대비 주요 심혈관계 사건 발생 위험을 20% 줄인 것으로 보고됐다. 같은 계열 약물이 대사이상 관련 지방간염, 이른바 MASH 치료제로도 미국에서 허가를 받으면서, 비만약은 지방간·당뇨·심혈관질환을 잇는 대사질환 스펙트럼 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를 토대로 ‘대사질환 플랫폼’ 전략을 구체화하는 분위기다. 하나의 약물 또는 계열을 중심으로 비만, 제2형 당뇨병, 심부전, 당뇨병성 신장질환, 지방간질환 등 다수 적응증을 엮어 보험·수가·데이터 전략을 통합 설계하는 방식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사질환 예방·치료에 투입되는 사회경제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장기적으로 GLP1 계열 약제에 대한 보험 적용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논의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도 비만 유병률과 관련 합병증 부담이 빠르게 늘고 있어, 시장 성장 여력은 충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고가 약제 중심의 처방 구조와 건강보험 재정 여건, 의료기관과 환자의 인식 차이가 변수다. 정 대표는 디지털 헬스 기반 행동 지원 프로그램과 실제 진료 현장에서 축적되는 사용 데이터를 활용한 근거 축적이 국내 시장 성공을 가르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약물 복용만으로는 생활습관 개선과 장기 순응도를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앱·웨어러블·원격 코칭을 결합한 통합 관리 모델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치료 효과의 지속성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임상 연구 결과에서 비만 치료제 복용을 중단한 뒤 1년 이내에 체중 감량 효과와 심혈관 지표 개선 효과 대부분이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관찰됐다. 고가 약제를 장기 복용해야 유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1년 복용 지속률이 30% 미만에 머물고, 비용 부담이 큰 환자군에서는 10% 이하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고된다. 약물 의존 모델과 현실적인 순응도 사이의 괴리가 크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혁신 기업들은 고도화된 임상 데이터와 강력한 브랜드, 차별화된 보험 전략, 디지털 솔루션 연계를 통해 단순 약제 공급을 넘어 ‘장기 관리 서비스’ 사업 모델을 구축해야 하는 상황이다. 환자 선별, 목표 설정, 복약 관리, 부작용 모니터링, 생활습관 개입을 하나의 데이터 플랫폼으로 묶을 수 있는 기업이 시장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인공지능 기반 예측 알고리즘을 통해 환자별 최적 용량과 치료 기간을 제안하는 기술은 향후 제약사와 보험자 모두에게 매력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정책 측면에서는 예방 중심 개입과 형평성, 재정 지속 가능성이 동시에 고려돼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한국을 포함한 다수 국가에서는 비만을 질환으로 인정하는 범위와 기준, 비급여와 보험 급여의 경계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비만 치료제를 조기 예방과 합병증 억제 수단으로 볼 것인지, 미용 목적 사용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따라 규제와 보험 정책의 방향이 갈릴 수 있다. 정 대표는 정책 당국이 예방 중심 보건의료 체계를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취약계층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형평성 있는 보장 구조, 장기 재정을 고려한 단계적 급여 모델을 설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업계와 규제기관, 의료계가 어떤 균형점을 찾느냐에 따라 비만 치료제의 산업적 위상과 공중보건 기여도가 달라질 전망이다. 제약사는 기술 혁신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실사용 데이터를 바탕으로 효과와 안전성, 비용 대비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정책 당국과 보험자는 의료 재정과 형평성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대사질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최적 조합을 모색해야 한다. 비만 치료제가 대사질환 치료의 중추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산업계와 보건당국의 선택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