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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조선에서 두 국가 선언까지”…북한 35년 만의 남북관계 인식 급변
정치

“하나의 조선에서 두 국가 선언까지”…북한 35년 만의 남북관계 인식 급변

임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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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의 근본 성격을 두고 정치적 충돌이 이어져 왔다. 최근 북한이 2국가 선언을 내세우며 남북 간 신경전이 고조되는 가운데, 35년 전만 해도 북한은 ‘하나의 조선’을 강조하며 남북의 국호 병기를 극도로 경계했던 사실이 과거 회담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통일부는 2일,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8차례에 걸쳐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의 공식 문서를 일제히 공개했다. 당시 남북은 양측 총리가 수석대표로 나선 회담에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며 분단 이래 유례없는 협상에 나섰다.

과거 남북 대화의 기록에 따르면, 북측은 남한이 제안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 명기를 “두 개의 조선으로의 분열”이자 “분열지향적 행위”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연형묵 당시 정무원 총리는 1991년 제4차 회의에서 “두개의 조선으로의 분열을 고착화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겨레의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북측은 국호 사용에 거듭 반발하였으나, 논의 끝에 쌍방 국호가 최초로 명시됐다.

 

남측의 유엔 동시 가입안과 각종 ‘상주대표부’ 설치 제안에도 북측은 “국가 대 국가 관계로 비춰질 수 있다”며 거부입장을 고수했다. 북측 최우진 순회대사는 “국가들 사이에서의 관계처럼 돼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고, 이 결과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설치로 결론났다.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송환, 핵문제를 둘러싼 긴장 역시 남북 협상 과정의 핵심 쟁점이었다. 19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마지막 고위급회담에선 북측 백남순(가명 백남준) 참사실장이 “노 대통령도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한다는 것이 우리한테 알려졌다”고 주장하며 송환 요구를 이어갔다. 이에 이동복 당시 안기부장 특보는 “절대로 송환할 수 없다”며 매몰차게 맞섰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이 실제로는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등에 호응할 경우 이인모를 송환할 수 있다’는 훈령을 내렸으나, 현장 대표단에는 전달되지 않았던 ‘대통령 훈령 조작·묵살 사건’이 뒤늦게 감사원 감사를 통해 확인됐다. 이동복 특보가 기존 조건 유지라는 허위 훈령을 만들어 공유했던 사실이다.

 

마지막 회담에서 비핵화 관련 협상도 불씨를 남겼다. 백남순 참사실장은 “우리한테는 핵무기 개발하는 핵시설도 없다”며 미국 핵시설 문제로 논점을 돌렸다. 이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 압박이 거세지자 1993년 3월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게 됐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이인모는 조건 없이 송환됐다. 한편 이번 남북회담 문서의 추가 공개로 남북관계 인식, 핵문제, 정치적 흥정의 속사정까지 다시 조명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2국가 선언 등 최근 북한의 입장 급변에 대한 분석과 경계의 목소리가 동시에 확산하는 분위기다.

임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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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남북고위급회담#노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