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 카이랄로 스핀 이동 제어”…韓 연구진, 차세대 반도체 도약 신호탄
나노미터 크기에서 스핀의 선택적 이동을 구현한 신개념 소자 기술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첫 선을 보였다. 고정밀 자기장이나 극저온 설비 없이, 금속의 카이랄(비대칭) 나선 구조만으로 상온에서 전자의 스핀을 방향별로 필터링할 수 있게 한 이번 성과는 스핀트로닉스 기반 차세대 반도체와 양자컴퓨팅 개발 경쟁의 흐름을 뒤흔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는 정보 저장·처리 효율이 크게 뛰어오를 ‘포스트 CMOS(상보성금속산화막반도체)’ 패러다임 전환의 신호탄으로 주목하는 모습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김영근 고려대학교 교수, 남기태 서울대학교 교수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자성을 띠는 ‘카이랄 나노 나선’ 구조를 제작, 상온을 비롯한 다양한 온도 환경에서 외부 자기장 없이도 스핀의 경로를 통제할 수 있음을 실증했다고 4일 발표했다. 이들은 금속의 결정화 과정을 전기화학적으로 정교하게 조절해 나노 스케일의 카이랄 자기 나선체를 만들고, 이 구조가 전자의 ‘업(↑)·다운(↓)’ 스핀 가운데 특정 방향만 선택적으로 통과시키는 효과를 실험적으로 규명했다. 기존의 유기 고분자 기반 카이랄 연구와 달리, 무기 소재에서 안정성·내구성이 높은 스핀 선택성이 구현된 데 학계·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전자의 스핀(양자역학적 자기모멘트)은 기존 반도체가 다루는 전하 이외에 정보의 또 다른 축을 제공한다. 스핀트로닉스는 이러한 전자 스핀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제어해, 고속·저전력·비휘발성 정보처리 소자(MRAM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신기술 영역이다. 이번에 구현된 카이랄 나선 구조는 3차원적 회전성을 활용해, 자연히 한 방향의 스핀만을 튕겨내거나 받아들이는 일종의 ‘스핀 다이오드’로 작동한다. 연구팀은 “자기장 생성 없이도, 나선체의 기계적 꼬임만으로 스핀 흐름에 선택성을 부여했다”고 설명했다.
스핀 선택적 이동 구조는 향후 양자컴퓨터 논리소자, 초소형 자성 메모리, 인공지능 가속 프로세서 등 첨단 분야에서 에너지 소비를 절감하고 장치 집적도를 높이는 데 핵심 기술로 꼽힌다. 동종 연구의 글로벌 경쟁 역시 치열하다. 최근 미국·일본에서는 카이랄 유기분자 기반 임시 구조로 부분적 스핀 필터링에 접근한 바 있으나, 상온에서 금속 기반 안정성을 확보한 무기체계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평가다.
기술적 병목이던 낮은 내구성, 높은 저항 문제 역시 이번 금속 카이랄 구조에서 개선 단초를 찾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연구팀은 “나노 나선이 스스로 기전력을 발생시켜, 카이랄 효과의 정량적 검증도 세계 최초로 구현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이 구조를 통과한 전자 스핀은 수 μm(마이크로미터) 이상의 거리에서도 정보 손실 없이 전파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에서는 ‘차세대반도체 국가전략’에 힘입어 카이랄·스핀트로닉스 연구가 가속 중이며, 정부 R&D 사업과 연계해 실용 소자 시제품 개발도 속도를 내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미국·유럽이 양자정보 소자와 결합, 독자 규격 선점 경쟁에 돌입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향후 기술 표준화와 상용화가 IT·바이오 융합 산업 지형을 바꿀 변수로 작동할 것으로 본다. 김영근 교수는 “카이랄 스핀트로닉스의 이론·실험적 원리가 무기소자에서 실질 구현된 만큼, 국내 반도체 경쟁력 제고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남기태 교수는 “분자를 활용한 나선 구조의 방향성 제어는 금속 분야에서 큰 의미”라며, “상온 스핀 필터링 기술이 산업화 단계로 이어질지 주목된다”고 밝혔다.
산업계는 이번 연구 기반 기술이 신반도체 시대의 필수 요소로 자리매김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기술 발전만큼 제도와 윤리, 글로벌 전략 산업 지형도 신속한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