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오름의 만년 숲길을 걷는다”…제주 세계유산축전서 만나는 밤과 낮의 자연
제주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올여름 세계유산의 길 위에서 잔잔하게 이어진다. 예전엔 멀게만 느껴졌던 화산섬의 시간을 직접 걷고, 불빛 아래 드리운 이국적 풍경을 경험하는 일은 이제 특별한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누구나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여름의 한 장면이 됐다.
요즘 자연과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SNS에는 거문오름 트래킹 인증 사진과 함께 ‘별빛 야간투어’ 후기를 남기는 이들이 눈에 띈다. 제주, 고창, 경주, 순천 등 전국의 세계유산이 한데 어우러지는 올해 제주 세계유산축전 현장에서는 ‘불의 숨길, 만년의 길을 걷다’와 같은 이색 트래킹 코스부터 밤하늘 별 아래 걷는 ‘세계자연유산 별빛야행 야간투어’까지 새로운 형태의 체험들이 예약 마감 소식을 낳고 있다. 성산일출봉 산행, 미공개 구간 특별탐험 프로그램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은 물론 솔로 여행자, MZ세대도 자연스럽게 섞여든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한국관광공사는 최근 “자연유산 현장 체험을 선호하는 연령층이 30~40대뿐 아니라 20대까지 고루 늘어난다”고 분석했다. 지역 공연, 주민 참여 프로그램, 리사이클 아트웍 등 이번 축전 기간 곳곳에서 펼쳐지는 행사는 현지와 여행자 모두가 자연 속 유산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전문가들은 이 흐름을 ‘자연의 느림과 기억의 공존’이라 부른다. 박정렬 제주지역 트래킹 가이드는 “세계유산을 걷는 순간, 걷는 이의 마음에 켜켜이 쌓인 인생도 조용히 돌아보게 만든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자연에서의 ‘체험’이 단순 관광이 아니라 자기만의 시간을 음미하는 과정으로 바뀌고 있다.
축전을 찾은 한 참가자는 “빛을 따라 걷는 거문오름의 밤길이 오래 남는 감정으로 저장됐다”고 고백했다. 축제 커뮤니티에서는 “지역 주민과 여행자가 함께 꾸미는 리사이클 아트웍이 인상 깊다”, “야간 공연에서 들려온 제주 사투리가 어쩐지 마음을 적셨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이젠 자연과 지역,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까지 모두를 품는 여행이 당연해졌다.
세계유산축전은 단지 한 번의 큰 이벤트가 아니다. 유산마을 주민들의 실경공연과 지역 아티스트들 버스킹, 구간 탐험과 생태 캠페인이 뒤섞여 ‘참여’란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오랜 세월 이 땅에 남겨진 자연과 인간의 흔적을 따라 걷고, 그 이야기를 조용히 체화하는 시간.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