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은진의 23시간 절규”…그것이 알고 싶다, 절망의 기록→시스템 외면한 사회의 침묵
어떤 목소리는 세상에서 이미 잊힌 뒤에야 비로소 들리게 된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조명한 故 김은진의 목소리 역시 그러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손에 쥔 23시간 분량의 녹음 파일, 그리고 아파트 통행로에 쓰러진 마지막 모습 그 이면엔 누구도 주목하지 못한 절규가 잠들어 있었다.
2025년 5월 12일, 동탄의 새벽을 가르던 비명은 한순간 모든 삶을 산산이 부쉈다. 출동한 형사들이 마주한 사건 현장은 이미 인간성의 마지막 끈마저 소실된, 계획적이고 참혹한 범죄의 흔적이었다. 결박된 손과 검은천, 상처는 단순 묘사로 담아낼 수 없는 피해의 깊이를 드러냈다. 이 범행은 우발의 영역이 아닌, 집요한 통제와 스토킹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범인의 일거수일투족은 고통스럽도록 체계적이었다. 피해자와 분리 조치 이후에도 그는 쉼 없이 거처를 추적했고, 결국 임시 오피스텔 주소까지 그림자처럼 쫓았다. 이 범죄가 단순한 감정 폭발이나 한순간의 분노가 아니라 누구보다 집요하게 구축된 데이트 폭력의 실체임을, 故 김은진의 주변인들과 경찰 수사는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경제적 통제와 일상화된 감시는, 12장짜리 유서에 담긴 왜곡된 구원자 서사에서 생생히 드러났다. 이 씨의 손에 쓰인 유서엔 자신을 자격 있는 구원자로, 피해자를 구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일그러진 욕망이 담겨 있었다. 수사진과 ‘그것이 알고 싶다’ 취재진은 이 유서의 모든 문장과 故 김은진이 남긴 23시간의 녹취를 하나씩 대조했고, 진실은 전혀 다른 얼굴로 드러났다. 현실의 김은진은 ‘사적인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반복되는 위협과 감시에 맞서 기록하며 끝내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한 사회적 목격자였다.
그가 남긴 방대한 녹음들은 증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폭언, 협박, 통제의 세부 장면들이 고스란히 저장된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것은 구원의 신호를 보내는 한 인간의 절박함이다. 자신의 목소리로 기록하고, 남기지 않으면 이 일상이 모두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 이는 데이트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피해자들의 보편적 생존 전략이자, 가스라이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고군분투의 표식이었다.
가장 뼈아픈 장면은 반복되는 신고와 증거 제출, 그리고 경찰의 무기력한 대응이다. 故 김은진은 구원 요청을 담아 1년간 세 차례나 신고했고, 마지막 신고엔 600쪽에 달하는 고소장과 80건의 증거 자료를 제출했다. 하지만 경찰은 ‘화해했다’는 말 한마디에 사건을 종결하고, ‘말다툼이었다’는 진술만으로 현장을 떠났다. 쌓여가는 녹음과 두터워지는 진술은 단지 또 하나의 서류더미에 불과했다. 끝내 구속영장 작성은 한 달 넘게 지연됐고, 담당자의 휴직이란 한 줄짜리 인수인계에 생명은 무너졌다.
취재진은 관계자들과 피해자의 지인들, 올곧이 그를 둘러싼 모든 증언을 모으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故 김은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600쪽의 고소장, 80여 건의 증거 자료, 그리고 마지막 23시간의 녹음 파일은 그 목소리에 답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침묵을 드러냈다. 사건은 피해자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찰서장의 늦은 사과와 감찰 착수, 그리고 경찰 수사 기록의 수차례 누락이 여운처럼 남는다. 제도적 미비, 보호 조치의 한계, 사회적 인식의 부재가 얽혀 한 여성의 삶을 앗아갔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범죄를 넘어 우리 사회가 외면한 데이트 폭력이 어떤 식으로 생명을 위협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가정폭력과 달리 데이트 폭력에 대한 보호 체계가 미비한 현실, 신고와 고소가 반복돼도 실질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대응 시스템, 그리고 고립돼가는 피해자들의 처절함이 한데 얽힌 결과였다.
이제 남겨진 것은 비로소 세상에 도달한 한 목소리다. 故 김은진이 1년 동안 남긴 절규의 기록은 더 이상 단순한 증거물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울림, 법의 이름으로 다시는 외면받지 않을 희생을 증명하는 증거다. 5월 31일 토요일 밤 8시 55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기록이 전파를 타고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