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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스파이커의 유산”…장윤창, 배구 역사의 별→전성기 추억으로 남다
스포츠

“돌고래 스파이커의 유산”…장윤창, 배구 역사의 별→전성기 추억으로 남다

정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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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시간 끝자락에서 장윤창의 이름을 기억하는 목소리가 잠시 멈춰 섰다. 1980~90년대 한국 남자배구의 상징이기도 했던 그는 고요한 이별을 맞이하며, 팬들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청춘의 한가운데에 뛰어든 소년은 결국 배구라는 무대 위에서 한 시대를 조율했다.

 

장윤창은 17세 인창고교 소년 시절,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으며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1978년 세계선수권에서 한국을 4강으로 이끌었고, 방콕·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각각 금메달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거는 등 국제대회에서 빛나는 기록을 남겼다. 그의 등장은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니라 한국 남자배구의 역동적인 부흥기 그 자체였다.

출처=연합뉴스
출처=연합뉴스

실업 무대로 무대를 옮긴 후에도 장윤창의 존재감은 더욱 뚜렷했다. 1983년 고려증권 창단 멤버로 합류하며 새로운 역사를 썼고, 현대자동차써비스와 함께 구단 라이벌리의 중심에 섰다. 대통령배 첫 대회에서 인기 선수상과 MVP를 동시에 거머쥔 순간, 한 명의 스타를 넘어 실업배구의 상징으로 존재했다. 

 

왼손 아포짓 스파이커였던 그는 한국 배구 최초로 ‘스카이 서브’를 선보이며, 허리 유연함을 앞세운 공격으로 ‘돌고래 스파이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보여준 실험과 혁신은 김세진, 박철우 등 한국 배구를 대표하는 왼손 파워 스파이커 계보로 이어졌다. 장윤창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순간마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코트에서 내려온 뒤에도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 유학길에서 체육학 석사, 박사 학위를 마친 뒤 경기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대한배구협회 강화이사와 한국배구연맹 경기위원, 스포츠국가대표선수회 회장까지 맡으며 미래 세대와 배구계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강인한 자기관리로 널리 알려졌던 장윤창은 위암 말기 투병 끝에 조용히 별이 됐다. 박주점 한국배구연맹 경기위원장은 “1980년대 한국 남자배구를 풍미한 최고의 스타였다”고 회상했다. 

 

아픈 시대의 한 조각, 그리고 잊히지 않을 열정. 장윤창이 걸었던 길은 남은 이들에게 도전과 영광, 그리고 품격을 남겨주었다. 남자배구의 황금기를 함께한 전설의 이름은 이제 역사와 추억이 돼 많은 이들의 마음에 남아 있다.

정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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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창#한국남자배구#스카이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