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한강 ‘소년이 온다’에 매료”…원작 각색 향한 숨겨진 열정→문학과 영화의 교차점에 선 긴장
조명이 은은하게 감도는 무대 위, 박찬욱 감독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국제도서전의 북적임 한가운데서도 그의 눈빛은 문학이 품은 무게에 고요히 머물렀다. 박찬욱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 앞에서 깊은 설렘을 숨기지 않았다. 완성도 높은 첫 챕터에 매혹된 순간부터 그는 한 문장 한 문장 오랫동안 가슴에 남겨뒀던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카메라 대신 밑줄을 긋듯, 텍스트가 그의 영감을 자극했다는 고백이 무대 위에서 울림이 돼 번졌다.
박찬욱은 신형철 문학평론가와 대담을 나누며 자신의 각색 열망을 솔직하게 전했다. 청중들로 가득한 행사장엔 ‘박찬욱 감독의 믿을 구석’이라는 주제만큼 각색과 창작의 진심이 흘렀다. 감독은 박경리의 ‘토지’, 이문구의 ‘관촌수필’, 신경숙의 ‘외딴방’, 김훈의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등 각색해보고 싶은 한국 소설들을 언급했다. 현실적인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분 좋은 희망”이라며 본인만의 문학적 동경을 전했다.

문학을 향한 오랜 애정은 작품 속 디테일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영화도 원작의 힘이 가장 큰 원천”이라며, 세심하게 쌓아온 텍스트-영상의 변환 과정을 밝혔다. ‘올드보이’,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에 이르기까지, 각색 과정마다 인상 깊었던 장면과 캐릭터 창조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전했다. ‘박쥐’에서 에밀 졸라 문체를 영상에 녹이는 고심, ‘아가씨’에선 세라 워터스의 소설적 결말을 머릿속에 새기며 영화의 윤곽을 그린 경험 등을 진지하게 풀어냈다.
박찬욱의 창작 세계는 한 문장,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된 감동의 퇴적이었다. 그는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W G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언급하며, 강렬한 문장이 어떻게 영화의 새로운 소재가 되는지 솔직하게 전했다. 밑줄 그은 부분이 작업 노트가 돼 화면 밖의 세계를 꿈꾸게 하고, 각색은 “계획된 여행이지만 늘 미지의 풍경에서 새로운 해석이 시작된다”며 여행에 비유했다.
박찬욱은 문학과 영화 사이, 그리고 이야기와 영상 언어가 만나는 그 긴장감의 경계에 자신이 서 있음을 알렸다. 익숙한 소설 한 장면이 다시 스크린 위에서 살아날 날을 고대하며, 그의 손끝에서 이어질 새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기대도 거울처럼 깊어지고 있다. 감독의 문학적 곡선은 앞으로의 행보마다 또 다른 감동을 예고한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진행된 이번 박찬욱과 신형철의 대담은 뜨거운 관심 속에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