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1945, 핵폭탄의 두 얼굴”…오펜하이머의 고통→냉전의 장막 뒤집혔다
밝은 미소와 함께 시작된 화면 위로 ‘월드 1945’는 핵폭탄 개발이라는 거대한 파동을 던졌다.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상이 만들어낸 힘은 곧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적막과 고통으로 번졌다. 한순간에 바뀐 세계의 균형은 시청자들에게 전율과 묵직한 질문을 남겼다.
프로그램은 독일의 패망 직후에도 꺼지지 않았던 태평양 전선의 긴장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거 뒤 갑작스레 역사의 키를 쥔 해리 S. 트루먼의 흔들림 없는 선택을 서사적으로 풀어냈다. 부통령 시절조차 존재를 몰랐던 ‘맨해튼 프로젝트’와 60만 명이 투입된 비밀 계획이 장엄하게 펼쳐졌다.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뜨거운 열망, 그리고 전쟁 억제라는 기대는 정치와 국제 외교의 복잡한 힘줄과 맞닿아있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긴박하게 파견한 과학자들과 함께, 프로그램은 당시 대서양을 잇던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를 치밀하게 되짚었다. 포츠담 회담의 숨 가쁜 분위기 속 트루먼은 핵실험 ‘트리니티’의 성공을 듣고, 하루 전 일본에 핵 투하 명령을 내렸다. 그의 결단과 냉철한 외교적 행보는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꿨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최초의 핵폭탄조차 일본 지도부의 항복을 끌어내지 못하자, 미국은 소련의 움직임과 맞물려 나가사키에 두 번째 폭탄을 투하했다.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릴 때, 오펜하이머의 내면에는 정복자의 승리보다 죄책감과 혼란이 깊게 스며들었다. 전쟁의 끝과 동시에 인류 앞에는 냉전의 냉기가 드리웠다.
승리의 이면에 드리운 것은 핵무기의 영구적 위협이었다. 미국이 핵 비밀을 국가 최상위에 봉인하자 동맹 영국도 분노를 표했고, 비밀은 결국 소련 과학자 출신 스파이들의 손을 거쳐 1949년 소련의 성공적인 핵 실험으로 이어졌다. 이 순간은 인류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군비 경쟁과 냉전의 문을 여는 신호탄이 됐다.
프로그램이 남긴 메시지는 뚜렷했다. 80년을 이어온 핵 균형의 시대, 오늘날에도 그 위태로운 평형은 쉽게 흔들리고 있다. ‘월드 1945’의 카메라는 여전히 인류에게 묻는다. 핵무기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 유산 앞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익숙한 역사 이면의 아픔과 딜레마를 응시하며, ‘월드 1945’는 더 큰 울림을 남겼다.
‘월드 1945’는 24일 밤 9시 30분, ‘3부 왕관의 무게, 달러’ 편을 끝으로 특별기획의 마지막을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