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동포 귀환운동 30년 헌신”…박노학, 7월 ‘이달의 재외동포’ 선정
사할린 동포 귀환 문제를 둘러싼 오랜 과제와 인도적 책임을 놓고 재외동포 기관과 박노학 전 사할린억류귀환한국인회 회장이 마주섰다. 냉전 구도 아래 단절된 한·러 교류 현실을 극복한 박노학의 활동에는 오랜 이산가족 아픔과 가족 상봉을 위한 정치·사회적 노력의 서사가 겹쳐진다. 재외동포청은 7월 ‘이달의 재외동포’로 박노학을 선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재외동포청(청장 이상덕)은 이날 7월 ‘이달의 재외동포’로 사할린 동포 귀환 운동을 주도한 박노학 전 회장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1914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박노학 전 회장은 1943년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이후, 해방 후에도 무국적 상태로 억류됐다. 박 전 회장은 1958년 일본으로 귀환한 뒤 귀환 운동 단체인 ‘화태(사할린) 억류귀환한국인회’를 창설하고, 오랜 세월 사할린 동포 귀환 및 가족 상봉을 위해 헌신했다.

박노학 전 회장은 특히 사할린 동포들의 편지를 한국 가족에게 전달하는 ‘우편배달부’ 역할을 수십 년간 자처했다. 당시 한·소 국교 미수립으로 우편 교환이 불가능했기에, 일본에 체류하던 박 전 회장은 사할린에서 온 편지를 받아 이를 장남 박창규를 통해 국내 가족에게 직접 전해주는 독특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박 전 회장 부자가 중개한 가족 연락 편지는 30여 년간 3만여 통에 이른다.
이와 함께 박노학 전 회장은 1960년대 중반부터 사할린 동포들의 국적, 지역, 귀환 희망 형태 등을 종합 정리한 ‘박노학 명부’를 만들어 약 7천명을 수록했고, 이는 한·일·소 삼국 외교 협상에서 중요한 증거 자료로 인용됐다. 동시에, 명부는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정책의 근거가 되면서 국가 정책 전환과정의 출발점이 됐던 셈이다.
정치적 설득과 국제공조 노력도 두드러졌다. 그는 일본 정치인들과 연대해 구소련 당국을 설득했고, 1984년에는 사할린 동포 10명의 일본 방문과 가족 상봉을 최초로 성사시켰다. 초청 대상자 선별, 숙소 마련, 통역 등 실무 역시 모두 자비로 도맡았다. 이후 박노학은 ‘사할린 동포가 일본을 경유해 모국 가족과 상봉’하는 방식을 일본 의원단과의 협의를 통해 제시했고, 결국 1988년 이 방식의 가족 상봉이 현실화됐다.
박노학의 헌신은 오늘날 정부의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지원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1988년 그의 공적을 인정해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이상덕 재외동포청장은 “박노학 전 회장은 강제 동원의 역사적 상처와 냉전의 벽을 넘어 사할린 동포 존재를 세상에 알린 진정한 선구자였다”며 “한평생 이산가족을 위해 힘쓴 그의 삶을 기리기 위해 이달의 재외동포로 선정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과 재외동포청은 사할린 동포 귀환 정책이 박노학의 헌신에서 비롯됐다고 평가하지만, 현재 남은 이산가족의 고령화·지원정책 한계도 과제로 남는다. 정부는 앞으로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지원사업의 확대와 동포사회 기록 보전 방안을 추가 검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