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에 투자 재편”…아시아 태평양 바이오텍 부상
미국과 중국 간 지정학적 긴장 고조가 제약·바이오 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중국 중심의 임상시험수탁(CRO), 위탁개발생산(CDMO) 의존도를 낮추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자체 연구개발(R&D) 역량 확대에 주목한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최근 투자금은 초기 단계 벤처가 아닌 임상 검증을 거친 후기에 집중되는 등 자본 이동도 뚜렷하게 달라지는 모습이다. 업계는 “글로벌 바이오텍 혁신 경쟁의 판이 바뀌는 계기”로 해석한다.
최근 베인앤컴퍼니와 싱가포르 과학기술연구개발청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시아 태평양 바이오텍 산업은 글로벌 혁신 허브로 급부상하고 있다. 미국의 ‘생물보안법’ 논의와 NIH(국립보건원) 보조금 축소, 그리고 미중 무역 리스크로 글로벌 빅파마의 전략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미국 제약사들은 CRO·CDMO 등 중국 의존 리스크 회피를 위해 한국·싱가포르 등으로 접근을 넓히고 있다.

특히 CRO(임상시험수탁기관), CDMO(위탁개발생산기관) 등 바이오텍 비즈니스의 전임상 단계 과정이 미중 긴장의 여파를 직접 받고 있다. 이에 더해 NIH 예산 축소로 미국 내 혁신 인재 이탈까지 더해지면서, 글로벌 제약사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 혁신 생태계로 이동하는 현상이 가속되고 있다.
투자 측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후기(임상 검증 완료) 단계 확장·성장 라운드 바이오텍 투자 거래는 1.5배 늘어난 반면, 초기 단계 투자금은 해마다 11%씩 감소했다. 투자자들이 입증 가능한 진전 단계의 프로젝트에 자본을 쏟는 양상이 두드러지는 셈이다.
이 같은 변화에 각국 정부는 적극 대응하고 있다. 한국 국가신약개발사업단(KDDF)은 2030년까지 16억 달러, 1200개 신약 개발 프로젝트에 투자 예정이다. 일본과 인도 역시 각각 3억6600만 달러, 다수의 벤처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 중이다. 보고서는 “중국·한국·싱가포르처럼 규제 프레임워크 간소화, 전임상 인프라, 숙련 인력 등 경쟁우위가 큰 국가가 바이오 자본 재배치의 직접 수혜를 볼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세포 및 유전자 치료제(CGT), mRNA, 항체약물접합체(ADC), AI 기반 신약 개발 등 차세대 모달리티 분야도 주목받는다. 2019년 이후 아시아 태평양으로 유입된 바이오텍 벤처캐피탈(VC) 및 사모펀드(PE) 투자의 75% 이상이 중국에 집중됐으나, 최근 지정학 불확실성으로 국내외 투자 경로가 분화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책 리스크로 중국 바이오텍 자금 조달이 둔화되는 가운데, 글로벌 제약·바이오 투자 다각화와 민간자본 이동이 한국·싱가포르 등에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다만 아시아 태평양의 지속 성장을 위해선 지적재산권 보호, 국제 기준과의 규제 조화, 성장 단계별 벤처 지원, 민간자본 공동 투자가 필수라는 주문도 나온다. 아울러 혁신인재 유치를 위한 비자 및 인센티브, 신규 진출 기업의 비용부담을 낮추기 위한 인프라 구축도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산업계는 지정학적 위험이 바이오 산업 구조변화와 투자 재편을 이끌면서, 아시아 태평양 바이오텍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입지를 더욱 높일지에 주목하고 있다. 기술 혁신과 규제, 자본조달의 균형이 향후 성장 동력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