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집착 버리면 만날 수 있다”…김정은, 트럼프 ‘좋은 추억’ 언급 속 대미 관계 조건부 시사

남북 관계와 북미 협상을 둘러싼 긴장이 다시 고조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미국을 향해 비핵화 목표를 포기하면 만날 수 있다고 발언하면서도, 남한과의 통일은 불필요하다고 강경 선을 그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좋은 추억을 언급한 발언에 대미 노선 유연성은 내비쳤지만, 핵 포기 불가 방침은 재확인했다. 북미 수뇌 회동 가능성, 한반도 정세 변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9월 21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3차 회의에서 “나는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며 “만약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2일 보도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 예정인 가운데, 북미 간 회담 재개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배경이 제시됐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우리는 절대로 핵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라며 기존 핵보유 노선을 강하게 재확인했다. “핵을 포기시키고 무장해제시킨 다음 미국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세상이 이미 잘 알고 있다”며 미국의 대북 정책 불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제재 풀기에 집착해 적수국들과 그 무엇을 맞바꾸는 것 같은 협상 따위는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또한 “미국을 위시한 서방 패권 세력이 전략적 패배를 안기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제재나 힘의 시위로써 우리를 압박하고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지적했다. 핵무기의 ‘제1사명’인 전쟁 억제력이 상실될 경우 ‘제2사명’인 핵 반격이 가동돼 한반도와 인근 동맹의 군사 인프라가 붕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나는 이런 위험한 사태발전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남북 관계에 대해 김정은 위원장은 더욱 적대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 “우리의 정치, 국방을 외세에 맡긴 나라와 통일할 생각이 전혀 없다”며 대한민국을 “모든 분야가 미국화된 식민지 속국, 이질적 타국”으로 규정했다. 이어 “결단코 통일은 불필요하다”며, 하나가 사라지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통일을 왜 이야기하냐는 반문을 내놨다.

특히 정부가 추진 중인 ‘중단-축소-비핵화’ 3단계론에 대해선 “전임자들의 숙제장에서 옮겨 베껴온 복사판”이라며 비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국과 국경을 사이에 둔 이질적인 두 국가임을 국법으로 고착시킬 것”이라고 예고하며, 해당 내용이 헌법 개정 절차와 연계돼 있음을 시사했다.

여야를 포함한 정치권과 외교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번 발언이 대미·대남 투트랙 압박전략의 일환이라며 예의주시 중이다. 한편 북한이 비핵화 포기 공식화, 남한과 선 긋기에 나서며 향후 한미, 한중, 북미 간의 외교 지형 변화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날 최고인민회의를 계기로 북한이 또 한 번 남북, 북미관계에 격랑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정부와 국회는 대응 전략 마련과 국제 공조 방안을 모색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