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병리 분석으로 EGFR 폐암 선별…면역항암 치료 패턴 바꿀까
인공지능 기반 디지털 병리 기술이 표적치료제 내성 이후 치료 선택지가 급격히 줄어드는 EGFR 변이 폐암 환자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국내 연구진이 AI로 면역항암제 효과를 볼 환자를 미리 골라내 임상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면역항암제 사용 전략이 정교하게 재편될 분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존에는 EGFR 변이 비소세포폐암에서 면역항암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여겨져 왔으나, 실제로는 일부 환자에서 극적인 반응이 관찰돼 왔다. 업계와 의료계는 AI 기반 바이오마커가 이 격차를 설명하고 치료 알고리즘을 바꿀 수 있을지에 시선을 모으는 분위기다.
이세훈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방영학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박근호 삼성융합의과학원 박사, 오진우 루닛 연구원으로 구성된 공동 연구팀은 2015년부터 2022년 사이 EGFR 표적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뒤 면역항암제 치료를 받은 비소세포폐암 환자 143명을 후향적으로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최근 미국면역항암학회 공식 학술지 암 면역치료 저널 최신호에 실렸다. 연구의 핵심은 전통적인 현미경 판독 대신 AI 기반 병리 분석을 활용해 면역세포와 혈관 구조를 정량화하고, 이를 면역항암 반응과 직접 연결했다는 점이다.

연구진이 사용한 플랫폼은 루닛의 인공지능 병리 분석 솔루션 루닛 스코프 아이오다. 이 시스템은 H E 병리 슬라이드를 학습한 딥러닝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종양 조직을 암세포가 밀집된 종양 중심부와 그 주변의 기질 영역으로 자동 분할한다. 이후 각 영역에 존재하는 종양침윤림프구와 혈관내피세포의 밀도를 픽셀 단위로 계산해 수치화한다. 사람이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미세한 공간 분포까지 반영하면서, 관찰자 간 편차가 크다는 전통적 병리 판독의 한계를 줄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연구 결과는 EGFR 변이 폐암이라는 불리한 면역 환경에서도 특정 미세환경 특성을 가진 환자군이 면역항암 치료 혜택을 볼 수 있음을 뒷받침했다. 표적치료제 내성 발생 후에도 암세포 영역 안에서 종양침윤림프구 밀도가 높은 환자는 면역항암제 반응률이 다른 환자군보다 4.3배 높았다. 암 진행 없이 지내는 무진행생존기간 역시 2.7배 길게 나타났다. 이는 면역세포가 실제 종양 내부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지 여부가 치료 반응을 가르는 중요한 변수라는 기존 면역종양학 가설을 실제 EGFR 변이 환자 집단에서 정량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혈관 구조를 나타내는 혈관내피세포의 분포 역시 의미 있는 지표로 작용했다. 암세포 영역 내 혈관내피세포 밀도가 높은 환자에서는 면역항암제 반응률이 5.2배 높게 측정됐고, 무진행생존기간도 1.4배 연장됐다. 혈관내피세포 밀도는 종양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약물과 면역세포의 교통로 역할을 하는데, AI 분석을 통해 이 미세혈관 네트워크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추적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연구진은 표적치료제 내성이 생기면 일반적으로 종양침윤림프구는 감소하고 혈관내피세포는 증가하지만, 그럼에도 두 지표가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되는 환자에서 면역항암제 효과가 뚜렷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경향은 면역항암제를 단독으로 투여한 환자뿐 아니라 화학요법과 병합한 환자군에서도 유지됐다. 병합요법은 화학요법이 종양 미세환경을 변화시켜 면역세포의 침투를 돕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설 아래 활용돼 왔는데, AI가 분석한 미세환경 지표가 이러한 전략의 효율성을 선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비소세포폐암은 전체 폐암의 약 85퍼센트를 차지하며, 이들 중 상당수가 특정 유전자 변이를 보유한다. 그 가운데 EGFR 변이는 아시아인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절반 가까이에서 발견된다. EGFR 티로신키나제 억제제 도입으로 생존 기간이 크게 늘었지만, 대부분 환자는 수개월에서 수년 사이에 내성에 부딪힌다. EGFR 변이 폐암은 원래부터 면역세포가 잘 침투하지 못하고, PD L1 발현 수준도 낮은 경우가 많아 면역항암제의 효과가 제한적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럼에도 일부 환자에서 장기 관해에 가까운 사례가 반복적으로 보고돼 바이오마커 탐색이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AI 기반 병리와 면역 미세환경 분석 경쟁이 본격화된 상황이다.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 제약사들은 디지털 슬라이드와 임상 데이터를 연계해 면역항암제 반응 예측 알고리즘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주요 기업들은 조직 내 면역세포 공간 분포, 세포 간 상호작용 네트워크, 종양 돌연변이 부담과의 연관성 등을 종합 분석해 차세대 동반진단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번 국내 연구는 EGFR 변이 폐암이라는 까다로운 집단에서 실제 임상 데이터로 AI 병리의 효용을 입증하는 데 의미가 있는 사례로 평가된다.
규제와 제도 측면에서는 AI 병리 분석이 면역항암제 처방 결정에 직접 쓰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현재 다수 국가에서 면역항암제 사용은 PD L1 발현, 종양 돌연변이 부담, 특정 유전자 변이 여부 등을 기준으로 이뤄지고 있다. AI가 분석한 조직 이미지 기반 지표를 공인 바이오마커로 인정받으려면 대규모 전향적 임상시험과 규제기관의 평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한국 식품의약품 관련 당국과 미국 식품의약국 등은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와 AI 병리 도구에 대한 심사 체계를 정비 중이며, 데이터 편향과 재현성, 설명 가능성 등도 심사 포인트가 되는 추세다.
산업계에서는 이번 연구가 면역항암제 후보선정 알고리즘과 병리 AI 솔루션의 가치를 동시에 높일 수 있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면역항암제는 고가 치료인 만큼 반응 가능성이 낮은 환자를 걸러내고, 혜택을 볼 가능성이 높은 환자에게 자원을 집중하는 방향으로 시장이 재편되는 중이다. 제약사 입장에서는 반응률을 높이고 임상 실패 위험을 줄이는 도구로, 병원과 환자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독성과 비용을 줄이는 수단으로 AI 기반 병리 분석의 활용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이세훈 교수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표적치료제 내성이라는 한계 속에서도 면역항암제의 문을 정확하게 여는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평가하며, 환자들에게 맞춤형 치료를 제시하는 데 이번 연구가 실질적인 근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AI 병리 분석이 후속 대규모 임상 검증을 통과해 실제 처방 가이드라인에 포함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