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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최소배치 기준 법제화 논의…데이터 기반 개편으로 안전성 논쟁

강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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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기관 간호 인력 배치 체계가 처음으로 과학적 수치를 전면에 내세운 개편 논의에 들어갔다. 응급실과 중환자실 등 24시간 가동되는 병동에서 환자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 인력 규모를 데이터로 제시하고, 이를 선택이 아닌 법적 의무로 삼자는 구상이다. 인력 부족이 만성화된 현 구조를 그대로 둘 경우 의료 질 저하와 안전사고 증가가 불가피하다는 위기 인식이 반영된 흐름으로 보인다. 디지털 헬스케어와 정밀의료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실제 병상 단위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호 인력의 물리적 한계를 먼저 바로잡지 않으면 의료혁신 효과도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도 따라붙는다. 업계와 의료계는 이번 기준 논의를 간호 인력 패러다임 전환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대한간호협회는 30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의료기관 간호사 최소 배치기준 마련 토론회를 열고 의료기관 간호사 최소 배치기준안을 공개했다. 간협 병원급 의료기관 간호사 배치기준 마련 TF에서 활동한 조성현 서울대학교 간호대학 교수가 데이터를 토대로 설계한 안으로, 1962년 제정 이후 수십 년간 유지돼 온 모호한 기준을 대체할 구체적 수치를 담았다. 핵심은 지금까지 사실상 권고에 머물렀던 간호사 배치 기준을 모든 의료기관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적 하한선으로 격상하자는 점이다.

현재 국내 병원은 간호관리료 차등제를 활용해 간호사 확보 수준에 따라 입원료를 가감하고 있다. 문제는 가장 낮은 등급에도 최소 배치 기준이 없어, 인력이 극도로 부족한 병원도 제도상 입원료를 청구하는 데 걸림돌이 크지 않다는 구조다. 조성현 교수는 현 제도가 간호사와 환자 모두를 위험 지대로 몰아넣고 있다고 평가했다. 환자가 지불하는 입원료와 실제 병동에서 제공되는 간호 서비스 양과 질 사이의 괴리를 줄이기 위해 규제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TF안은 상급종합병원 성인 일반병동을 기준으로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를 2027년 8.4명, 2028년 7.2명으로 단계적으로 줄이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지금보다 적은 수의 환자를 한 명의 간호사가 담당하도록 법으로 못 박겠다는 방향이다. 중환자실과 응급실, 수술실 등 중증도가 높고 업무 강도가 큰 병동은 기능과 환자 상태의 차이를 반영해 세분화된 기준으로 설계했다.

 

특히 응급실의 경우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도구인 KTAS 단계별로 최소 배치기준을 달리 적용하는 방식을 내놓았다. KTAS는 환자의 응급도를 1단계부터 5단계까지 나누어 분류하는 체계로, 환자의 생체징후와 증상, 위험도를 종합해 긴급 진료 순서를 정하는 데 활용된다. TF는 이 지표를 간호 인력 산정에도 반영해, 응급도가 높은 환자가 많은 시간대의 응급실에는 더 많은 간호 인력이 기본적으로 배치되도록 하자는 접근을 취했다. 단순 병상 수가 아니라 실제 치료 필요도와 업무량 기반으로 인력을 정하겠다는 시도다.

 

TF는 또 365일 24시간 운영되는 병동 현실을 고려해 배치상수 4.8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환자 곁에 간호사 1명이 24시간 상주하려면 휴무와 3교대 근무, 교육 시간과 병가 등을 포함해 실제로 약 4.8명의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의료 AI나 업무지원 정보시스템이 확산되고 있지만 환자 모니터링, 응급상황 대처, 심리적 지지처럼 사람이 직접 수행해야 하는 간호 업무 비중은 여전히 높다는 점을 반영한 산식이다. TF는 간호사의 건강권과 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해 이 배치상수를 2031년까지 단계적으로 상향 조정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조 교수는 인력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간호사 소진과 이직률을 충분히 낮추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병원 재정 구조와 임금 체계, 지역 간 인력 쏠림 해소까지 묶은 패키지 개편이 뒤따라야 한다는 설명이다. 구체적으로는 간호관리료 제도 전면 재검토, 지방 중소병원과 수도권 대형병원 간 임금 격차 완화, 야간 근무 가산 확대 등의 정책 수단이 거론된다.

 

정치권도 제도 개편 필요성에는 대체로 공감대를 보였다.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남인순, 서영석, 서미화 의원은 토론회에서 선진국에서 간호사 1명이 4명에서 5명 수준의 환자를 담당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16명 수준을 감당하는 왜곡된 구조가 이어져 왔다고 지적했다. 단순 비율 조정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 업무량을 반영한 배치 기준을 간호법에 명시해 숙련 인력이 현장을 떠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국민의힘 김미애, 김예지 의원도 60년 된 구시대적 산식을 버리고 환자 인권을 반영한 기준을 법제화하는 작업이 시급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다만 지역 간 의료 접근성 차이와 중소병원의 인력 쏠림 심화 우려에 대해서는 별도의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취약지 병원의 간호 인건비를 정부가 직접 지원하거나, 공공의료기관을 중심으로 지역 인력 순환제를 설계하는 방안 등이 후속 논의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신경림 대한간호협회 회장은 배치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기준을 지키지 않는 기관에 실질적인 제재를 가하는 구조가 마련돼야 제도가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료기관이 간호사 배치 현황과 간호등급을 병원 홈페이지나 공공 플랫폼에 주기적으로 공개하고, 이를 건강보험 수가와 연계해 인센티브와 패널티를 동시에 적용하는 방식이 유력한 시나리오로 언급된다.

 

좌장을 맡은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학 교수 사회로 진행된 지정토론에서는 간호사 대 환자 비율과 환자 치료 결과의 연관성이 재차 확인됐다. 강미영 대림성모병원 간호본부장은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이 낮을수록 재원 일수와 병원 내 감염, 중환자실 추가 입원과 사망률은 줄고, 환자 만족도는 높아진다는 다수 연구 결과가 축적돼 있다고 설명했다. 더 많은 간호사가 있을수록 낙상과 투약 오류, 감염 관리 등에서 세밀한 관찰이 가능하고, 이는 의료비 절감과 직결될 수 있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김민건 부천고려수재활요양병원 간호사는 간호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실제 간호사가 배치되도록 하는 규범이 상식이자 법적 의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제도에서 간호사 정원을 간호조무사로 일정 비율까지 대체할 수 있는 구조가 남아 있어, 직종 간 업무 부담 불균형과 법적 책임의 모호성이 계속된다는 지적이다. 그는 전문 간호와 보조 업무의 역할 분담을 재정립하고, 교육 수준과 자격 요건에 맞는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해야 현장의 갈등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배성희 이화여대 간호대학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 퀸즐랜드 등에서 간호사 최소 배치 기준 도입 후 환자 사망률 감소와 의료 질 향상, 간호사 직무 만족도 증가가 확인됐다고 소개했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연구에서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이 낮을수록 재원 기간이 짧아지고 미완료 간호가 줄어든 효과가 관찰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통계는 간호 인력 확충이 단순 비용 증가가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는 재입원 감소와 의료 과오 감소 등을 통해 시스템 전체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투자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소비자 관점의 우려도 제기됐다. 유미화 GCN녹색소비자연대 상임대표는 인력 부족으로 인한 환자 안전사고를 줄이려면 숫자 채우기에 그치지 말고 질적 평가와 상시 모니터링이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의료 격차를 줄이기 위해 취약지 간호 인력 지원 프로그램과 교육 인프라 확충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기반 모니터링 시스템을 통해 간호사 업무량과 환자 안전 지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정책 조정에 활용하자는 제안도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

 

이주호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자문위원은 간호등급과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을 의료기관이 직접 신고해 공개하도록 하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려면 현재 월간이나 분기 단위로 집계되는 일부 지표를 일별 기준으로 전환하고, 환자와 보호자가 병원을 선택할 때 간호 인력 수준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보건복지부도 제도 개편 논의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태길 보건복지부 간호정책과장은 요양병원과 중소병원의 간호사 배치 기준은 의료 서비스 질과 간호사 처우에 직결되는 핵심 의제라며, 간호법 제29조에 명시된 정책 수립 의무를 토대로 신중하면서도 책임 있는 검토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새 배치 기준이 법제화되려면 재정 추계와 병원 경영 영향, 인력 공급 계획, 교육기관 정원 조정 등 다층적인 조율이 요구될 전망이다.

 

의료계와 산업계는 간호사 최소 배치 기준이 실제법으로 자리 잡을 경우, 디지털 헬스케어와 정밀의료, 원격 모니터링 등 첨단 기술의 효과가 극대화될 여지도 있다고 본다. 병동당 충분한 간호 인력이 확보돼야 AI 기반 예측 시스템과 전자의무기록, 웨어러블 모니터링 장비 등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를 안전하게 해석하고 환자에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의료 현장 구조의 변화 속도를 새로운 기준이 따라가지 못할 경우, 병원 경영 부담과 지역 의료 공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산업계는 이번 간호사 최소 배치 기준 논의가 실제 시장과 의료 현장에 어떻게 안착할 수 있을지 향후 입법 과정과 예산 논의를 주시하고 있다.

강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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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간호협회#간호사최소배치기준#응급실배치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