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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은 한국·투자는 미국”…한미, 정상합의 이행 앞두고 우선순위 엇갈렸다

오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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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 간 합의를 둘러싸고 원자력과 대미 투자를 둘러싼 우선순위 차이가 선명해지고 있다. 한국은 우라늄 농축과 핵추진잠수함 등 안보·원자력 협력을 서둘러 구체화하려 하고, 미국은 한국의 투자와 한미동맹 현대화에 더 큰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박윤주 외교부 1차관과 크리스토퍼 랜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1일 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만나 약 40분 동안 회담을 갖고 한미 정상 간 공동 팩트시트 이행 방안을 논의했다. 이 회담은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29일 경주 회담 후 11월 14일 공동 팩트시트를 내놓은 뒤 처음 열린 고위급 후속 협의다.

앞서 양국 정상은 한국이 3천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한국산 자동차 등에 부과해 온 관세를 인하하며 한국의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핵추진잠수함 도입을 지원 또는 승인하는 내용을 담은 합의에 서명했다. 안보와 무역, 산업 협력이 맞물린 포괄 합의였던 만큼, 후속 이행 속도와 범위가 한미 관계 전반의 중요 변수로 떠올랐다.

 

외교부에 따르면 양측은 원자력, 조선, 핵추진잠수함 등 주요 분야의 후속 조치를 신속하고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분야별 실무협의체를 조속히 가동하기로 뜻을 모았다. 박윤주 차관은 특히 한국의 민간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위한 한미 간 협의 절차를 조기에 개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랜도 부장관은 이에 양측이 긴밀히 소통해 나가자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양 차관은 핵추진잠수함과 조선 협력 문제에 관해서도 한미 간 협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공조해 나가기로 했다. 경수로 연료 주기와 잠수함 추진체계처럼 민감도가 높은 영역을 둘러싼 논의 틀부터 서둘러 짜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가 회담 후 내놓은 자료에는 우라늄 농축이나 핵추진잠수함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지 않았다. 양측이 공동성명처럼 단어 하나까지 조율하는 형식이 아닌 만큼 발표 내용의 차이는 통상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지만, 국내 홍보 효과가 큰 사안일수록 각자 강조점을 드러내는 경향을 고려해도 차이가 눈에 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무부 자료에 따르면 랜도 부장관은 회담에서 한국의 대미 투자를 거듭 높이 평가했다. 그는 조선업을 비롯한 전략 산업 분야에서 한국이 약속한 대규모 투자를 언급하며 한국의 투자가 미국 제조업 재산업화 노력에 상당히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미 정상회담 합의의 핵심을 미국 측은 대미 투자와 제조업 재건에서 찾고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이 우라늄 농축,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핵추진잠수함 도입에 방점을 찍는 것과 달리 미국은 동맹 현대화와 자국 내 투자 유치에 관심을 더 두면서, 사안별 이행 속도 차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특히 원자력 연료주기 관련 합의와 핵추진잠수함 도입 문제는 미국 내부에서 상당한 조율과 관련 규정 개정이 필요한 민감한 사안으로 꼽힌다.

 

외교가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강한 정치적 의지를 갖지 못할 경우 이 분야 합의가 추진 동력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미 간 우라늄 농축과 핵추진잠수함 협력이 본격화되려면 다층적인 기술·규제 검토가 수반될 수밖에 없고, 협의가 지연되는 사이 트럼프 대통령이 퇴임하게 되면 사실상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미국 내 고물가 부담과 경기 불확실성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고, 집권 여당인 공화당이 내년 11월 중간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조기 레임덕에 직면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돼 있다. 이 같은 정치 환경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합의 이행에 얼마나 정치적 자원을 투입할지 예단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이 때문에 외교가에서는 원자력 협력을 둘러싼 실무 협의체 구성 속도와 초기 합의 수준이 트럼프 행정부의 이행 의지를 가늠할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초기에 일정 수준 이상 진전시켜 차기 미국 행정부가 되돌리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한국 외교 당국의 과제로 떠오른 셈이다.

 

국무부는 또 이번 회담에서 한미동맹 현대화 이행 방안도 논의했다고 강조했다. 이는 외교부 발표문에는 포함되지 않은 대목이다. 다수의 전략가들은 한미동맹 현대화가 한국의 대북 억제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주한미군 전력을 중국 대응에 더 집중하게 하려는 미국 측 구상을 내포한다고 분석해 왔다. 한국 정부는 관련 논의에 적극 임하면서도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외교적 고려를 병행해 왔다.

 

반면 미국이 관심을 두는 무역·투자 분야에서는 합의 이행이 상대적으로 매끄럽게 진행되는 분위기다.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한국의 부담이 적지 않지만, 미국은 자국이 자의적으로 부과한 관세를 낮추는 방식으로 합의를 이행하면 되기 때문에 한국이 투자 계획을 지키는 한 큰 변수가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 엑스에 올린 성명에서 한국 국회가 전략적 투자 법안을 추진하기 위해 공식 절차에 착수했다며 환영 입장을 밝혔다. 그는 합의에 따라 한국산 자동차 관세를 11월 1일부로 15퍼센트로 조정하는 내용을 포함해 특정 관세를 인하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러트닉 장관이 언급한 법안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26일 국회에 발의한 한미 전략적 투자 관리를 위한 특별법안, 이른바 대미투자특별법이다. 한미 양국은 이 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달의 1일자로 한국산 자동차 관세를 15퍼센트로 낮추고 이를 소급 적용한다는 데 이미 합의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조만간 미국 행정부가 관세 인하를 위한 내부 행정절차를 마무리하고, 관보 게재 등 절차를 통해 한국산 자동차 관세 조정 방침을 공식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법안의 국회 심의 과정과 함께 한미 간 투자 일정 조율이 속도를 내면, 무역·투자 부문에서의 정상 합의 이행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한국 정부는 원자력·조선·핵추진잠수함 등 안보·전략 분야에서 조속히 실무협의체를 가동해 협상을 진전시키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동맹 현대화와 대미 투자, 제조업 재건에 방점을 찍고 있는 만큼 양국이 각기 다른 우선순위를 어떻게 조율할지가 향후 관건이 될 전망이다.

 

정부는 향후 추가 고위급 협의를 통해 분야별 협의체 구성과 세부 일정 조율에 나설 예정이고, 국회 역시 대미투자특별법 심사를 통해 정상 합의의 국내 이행 기반을 마련하는 데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오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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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정상합의#이재명#도널드트럼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