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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 억제 기전 찾았다"…정부, 국가대표 R&D 100선 공개

신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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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과 대사질환을 겨냥한 신약 개발 경쟁에서 뇌 신호를 직접 겨냥하는 기전 연구가 새 변곡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올해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건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음식 인지만으로도 포만감을 유도하는 비만치료제 기전을 규명한 연구를 최우수성과로 올리면서다. 같은 목록에 뇌 이식형 텔레파시칩, 사람 수준의 촉각을 구현한 로봇핸드, 실시간 딥페이크 음성 탐지 기술 등이 포함되며 IT와 바이오, 로봇, 보안이 뒤섞인 융합 기술 축도 드러났다. 업계에서는 이번 라인업이 향후 국가 전략 R&D 투자 방향과 규제 논의의 기준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2일 각 부처와 청이 추천한 970개 국가연구개발 성과 중 100건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으로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산학연 전문가 105명이 참여한 평가위원회 심사와 대국민 공개 검증을 거쳤고, 이 가운데 파급력이 크다고 평가된 12건이 최우수성과로 꼽혔다. 올해로 20년째를 맞은 이 제도는 연구 현장의 성과를 산업과 사회로 확산하기 위한 대표적인 성과 포트폴리오로 활용되고 있다.  

바이오·의료 분야에서 가장 주목받은 성과는 서울대 연구진이 수행한 GLP-1 기반 비만치료제 기전 규명이다. 세계적인 대사질환 치료 타깃인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 1이 뇌의 시상하부에 작용해, 실제 섭취가 아닌 음식 인지만으로 배부름 신호를 유발한다는 점을 동물실험과 신경회로 분석으로 입증했다. GLP-1은 현재 다수 비만·당뇨 치료제가 활용하는 호르몬 신호로, 기존에는 위장 운동과 인슐린 분비 조절 중심 기전이 강조됐다. 이번 연구는 포만감과 식욕 조절의 ‘뇌 회로 연결고리’를 구체화해, 향후 더 정밀한 비만치료제 설계와 부작용 감소 전략 설계에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글로벌 블록버스터로 떠오른 GLP-1 계열 약물 경쟁이 신경회로 표적 수준으로 세분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분야에서도 기술 수출 규모와 임상 전략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가 포함됐다. 아이엠바이오로직스가 개발한 류마티스 관절염 등 자가면역질환 표적 치료제는 미국 네비게이터 메디신, 중국 화동제약과 총 1조7000억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기존 경쟁 약물 대비 우수한 효능과 안전성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되면서, 국내 항체·단백질 치료제 개발 역량이 글로벌 파트너링 시장에서 가격과 데이터 경쟁을 본격화할 수 있는 단계에 진입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형 제약사가 외부 혁신 파이프라인 확보를 위해 기술도입을 확대하고 있어, 국내 기업에도 추가 라이선스 아웃 기회가 열릴 가능성이 있다.  

 

정보·전자 분야에서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개발한 전방위 촉각감지 로봇핸드가 선정됐다. 사람 피부처럼 연속적인 압력을 감지하는 유연 압력센서 어레이를 손가락 전면에 집적해, 로봇이 물체 감촉과 힘의 분포를 고해상도로 인지하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기존 금속·단일축 센서 기반 로봇 그리퍼가 정밀 작업과 섬세한 접촉 제어에 한계를 보였던 것과 달리, 이번 기술은 불규칙한 물체 표면과 미세한 힘 변화를 감지해 제조 공정, 물류 피킹 작업, 수술 보조 로봇 등에서 인간에 가까운 조작 능력을 구현할 수 있다는 평가다. 국내 기업에 이미 기술이전과 사업화가 진행된 만큼, 글로벌 로봇 플랫폼과 연계한 확장 가능성도 거론된다.  

 

뉴로테크와 헬스케어 융합 영역에서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이 개발한 뇌 이식형 무선 텔레파시칩이 눈에 띈다. 영장류 뇌에 완전히 매립하는 이 칩은 기존 유선 또는 배터리 부착 방식과 달리 1개월 이상 외부 드러남 없이 신경 신호를 연속 기록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완전 매립형 구조를 위해 초저전력 회로와 무선 전력·데이터 전송을 통합한 것이 특징이며, 장기 기록 안정성이 확보되면서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등 난치성 뇌질환의 병태생리 연구와 신경 보철 인터페이스 개발에 활용될 전망이다. 해외에서는 비슷한 뇌 컴퓨터 인터페이스 프로젝트가 임상 시험 단계를 밟고 있어, 국내 기술도 규제·윤리 논의를 병행하면서 상용화 경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에너지·환경과 제조 분야에서는 이종 산업을 겨냥한 기술 자립과 공급망 다변화가 강조됐다. STX엔진은 K9 자주포에 탑재되는 1000마력급 엔진과 핵심 부품을 국산화해 외산 의존에서 벗어났고, 수출 승인 리스크를 줄이면서 이집트에 국산 엔진 탑재 K9 수출을 성사시켰다. 에이치투는 바나듐 흐름전지용 스택 성능을 크게 끌어올려 국내에서 처음 관련 제품을 독일에 수출했다. 바나듐 흐름전지는 태양광, 풍력 등 변동성 재생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필요한 대용량 에너지저장시스템 핵심 기술로, 장수명과 안전성이 강점이다. 국내 업체가 스택 고효율 설계와 소재 내구성 개선에서 성과를 내면서 ESS 시장에서 가격과 성능을 함께 겨냥하는 전략 수립이 가능해졌다는 분석이다.  

 

사회 문제 해결형 디지털 기술도 별도의 트랙으로 부각됐다. 정부는 우수성과 가운데 국민 체감도가 높은 12건을 사회문제 해결성과로 따로 뽑았는데, 그 중 숭실대의 실시간 딥페이크 음성 탐지 기술은 보이스피싱, 가짜뉴스, 금융사기 대응 관점에서 상용화 파급력이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음성 합성 AI가 생성한 위변조 음성을 음향 특징과 발성 패턴, 신경망 기반 이상 탐지 모델을 결합해 분류하는 방식으로, 콜센터와 금융 상담, 통신망 보안 시스템에 탑재될 경우 사전 경고 체계 구축에 활용될 수 있다. 글로벌 금융권에서도 음성 기반 인증이 확산되는 만큼, 국내 기술의 조기 상용화와 국제 표준 연계가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번에 선정된 우수성과에 제도적 인센티브를 부여해 후속 연구와 사업화를 뒷받침한다. 관계 규정에 따라 향후 과제 선정과 기관평가 시 가점을 부여하고, 연구자는 국가연구개발 성과평가 유공포상 후보로 추천된다. 더불어 내년에는 선정 과제를 대상으로 3년간 과제당 약 13억원 규모 후속 연구를 지원하는 사업 공모를 진행한다. 내년 1월 공모가 별도로 열리며, 최근 3년 이내 우수성과 선정 과제가 대상이다.  

 

연구계와 산업계에서는 이번 100선이 IT와 바이오, 에너지, 국방을 아우르는 국가 전략 포트폴리오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본다. 비만치료제 기전 규명과 뇌 이식형 칩, 촉각 로봇핸드, 딥페이크 탐지 등은 기술적 참신성뿐 아니라 규제와 윤리, 글로벌 시장 진입 전략을 함께 요구하는 분야다. 박인규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대학, 연구소, 기업에서 축적된 선도 연구성과가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후속과제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밝히며, 관계부처와의 협력을 예고했다. 산업계는 이러한 정책 지원이 실제 상용화와 글로벌 협력으로 연결될지 주시하고 있고, 기술과 제도, 시장 구조 전환이 맞물린 종합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신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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