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노화 치료제 부상…글로벌 제약, 비만약 잇는 차세대 성장축 주목
비만치료제 열풍 이후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의 다음 성장축으로 항노화 치료제가 부상하고 있다. 고령화 가속과 건강 수명 연장 요구가 맞물리면서, 단순 미용 중심의 안티에이징을 넘어 노화를 질환으로 보고 직접 개입하려는 흐름이 빨라지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면역항암제와 GLP 계열 비만치료제가 이끌어온 시장 패러다임이 향후 항노화 플랫폼으로 확장될 것으로 내다본다. 동시에 모바일 앱과 웨어러블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가 결합된 헬시에이징 모델이 의료와 제약, IT 산업 전반의 새로운 경쟁 무대로 거론되고 있다.
이병건 플래그쉽 파이오니어링 한국 고문은 최근 열린 2025 제약바이오투자대전에서 시장의 흐름이 면역항암제에서 비만치료제로, 다시 항노화 치료제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뇌신경계질환과 항노화를 미래 신성장 산업으로 꼽으며, 항노화와 같은 차별화 분야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의료관광 사업과 연계할 경우 고령층 대상 프리미엄 헬스케어 패키지가 새로운 수익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제시했다.

업계 컨설팅 분야에서도 비슷한 분석이 나온다. 박소영 한국아이큐비아 상무는 아이큐비아 인사이트 포럼에서 전 세계적 고령화에 따라 헬시에이징 수요가 급증했고, 제약산업 패러다임이 노화 치료와 디지털 케어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안티에이징이 피부 시술과 기능성 화장품에 머물렀다면, 지금의 헬시에이징은 노화 기전 자체를 규명하고 이를 표적으로 하는 치료제 개발로 확장되는 중이라는 설명이다.
항노화 시장의 핵심 특징으로는 노화의 질병화, 그리고 디지털 케어의 본격 도입이 꼽힌다. 유전체, 세포 노화, 단백질 항상성 등 기전 연구가 축적되면서 노화를 단일 현상이 아닌 복합 질환군의 근간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동시에 넓은 국토와 의료 인프라 격차를 가진 미국을 중심으로 원격진료와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활용한 장기 모니터링 서비스가 확산되고 있다. 항노화 치료제와 디지털 모니터링을 패키지로 묶어 만성질환 예방, 인지기능 관리 등으로 확장하는 전략이 대표적이다.
박 상무는 최근 제약사가 노화 기전 기반 치료제 연구와 디지털 헬스케어를 결합해 헬시에이징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모바일 앱을 통한 복약 관리, 웨어러블 기기를 활용한 수면·활동량·심혈관 지표 추적이 대표 예다. 이러한 데이터는 실제 임상시험 설계와 실사용증거 수집에도 활용될 수 있어, 항노화 약물의 효과 검증과 보험 등재 논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로 거론된다.
기술 트렌드를 보면, 현재 항노화 분야를 선도하는 명확한 글로벌 1위 주자는 없지만, 여러 바이오텍이 특정 노화 기전에 초점을 맞춰 분화된 경쟁을 전개 중이다. 박 상무가 꼽은 대표 해외 기업으로는 줄기세포 고갈을 타깃으로 하는 롱에버론과 메조블라스트가 있다. 두 회사는 노화에 따라 기능이 떨어진 줄기세포를 보충하거나 활성화하는 세포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으며, 근감소, 면역 기능 저하 등 노화 연관 증상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텔로미어 길이 단축을 공략하는 기업으로는 제론이 거론된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말단을 보호하는 구조로, 반복적인 세포 분열 과정에서 짧아지며 세포 노화를 유도한다. 제론은 이런 텔로미어 생물학을 기반으로 골수이형성증후군, 급성 골수성백혈병 등 혈액암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노화 관련 세포 신호전달 장애를 타깃으로 골관절염과 알츠하이머 치료를 시도하는 기업들도 뒤를 잇고 있다.
단백질 항상성 붕괴와 미토콘드리아 기능 장애 역시 주목받는 축이다. 단백질 항상성은 세포 내 단백질이 제때 합성·접힘·분해되는 균형을 뜻하는데, 이 균형이 깨지면 알츠하이머,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신경질환 위험이 높아진다. 캘리코와 코그니션은 이러한 기전을 겨냥한 약물과 플랫폼을 연구 중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에너지 발전소 역할을 담당하는 소기관으로, 기능 저하는 피로, 대사질환, 신경계 이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젠사이트, 미노비아 등이 해당 기전 기반 파이프라인을 확보하며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항노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운 신약 및 재생의료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차바이오텍은 생식기관 노화 역전과 기능 회복을 목표로 줄기세포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난소 기능 저하, 조기 폐경 등 난치성 생식질환을 겨냥한 접근으로, 향후 고령 임신, 불임 치료 시장과도 연계될 수 있는 분야다. 이엔셀은 줄기세포 기반 스킨 부스터 등 항노화 신사업을 확대하며 미용·피부 재생 영역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줄기세포 미용 치료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커지는 점을 감안해, 해외 진출을 통해 내년 이후 신규 매출원을 확보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학계의 기전 연구도 항노화 전략의 과학적 근거를 넓히고 있다. 서울대학교 연구진은 비만 상태에서 일부 내장지방 내 특정 효소 활성화가 DNA 손상을 유발하고, 이것이 세포 노화와 대사질환 악화로 이어지는 경로를 규명했다. 연구팀은 이 기전과 연관된 노화세포를 제거하거나 대사 항상성을 회복하는 접근이 비만과 노화 관련 질환 치료에 활용될 수 있다고 제시했다. 비만치료제와 항노화 타깃 약물이 동일한 대사 경로를 공유할 경우, 향후 복합 요법이나 치료 순차 전략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글로벌 시장 측면에서 항노화 분야는 아직 명확한 규제 틀이 완비되지 않은 과도기 단계로 평가된다. 노화를 독립 질환으로 볼지, 개별 만성질환 위험 인자로 볼지에 따라 임상시험 설계와 허가 전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고령자 대상 실사용 데이터 축적과 디지털 바이오마커 검증이 진행되고 있어, 장기적으로는 노화 지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임상 종결점 설정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항노화 치료제가 비만치료제급의 시장 규모로 성장할지 여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지만, 고령화 사회에서 건강 수명 연장 기술에 대한 지불 의향이 높은 만큼 중장기 성장 잠재력은 크다고 보고 있다. 국내외 제약사와 IT 기업들이 디지털 헬스케어, 재생의료, 세포·유전자치료제 등 인접 영역을 묶어 포트폴리오를 짜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산업계는 항노화 기술이 실제 임상 근거와 규제 프레임을 확보하고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