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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가 압박에 빅파마 대수술…단기 투자와 인수합병 확산 조짐

배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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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기 둔화와 약가 인하 압박이 겹치면서 대형 제약사 중심 구조조정이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블록버스터 의약품의 특허 만료가 예고된 상황에서 빅파마들은 고위험 신약개발보다는 임상 성공률과 수익 가시성이 높은 자산 중심으로 투자를 재편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인력 감축과 내부 파이프라인 조정보다 외부 기술 도입과 인수합병 확대가 내년 이후 제약바이오 산업 재편의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본다.

 

허혜민 키움증권 연구원은 2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25 제약바이오투자대전 발표에서 올해 제약바이오 업계 인력 구조조정이 급증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올해 3분기까지 발표된 해고 규모가 이미 지난해 연간 수준을 넘어섰다고 설명했다.

허 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11월 초까지 글로벌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발표된 감원 인원은 3만 2824명으로 집계됐다. 2024년 연간 수준으로 추정되는 1만 9318명을 크게 상회하는 수치이며, 2023년 1만 7656명, 2022년 1만 8505명과 비교해도 구조조정 강도가 크게 높아졌다. 구조조정 계획을 공시한 기업 수는 작년과 유사하지만, 기업당 감원 규모가 커진 것이 특징으로 나타났다.

 

개별 기업 단위로도 대규모 감원이 속출하고 있다. 노보노디스크는 전체 직원 7만 8400여 명 가운데 약 9000명 감원 계획을 내놨고, 머크 역시 전 세계적으로 약 6000명 인력 감축을 발표했다. 모더나는 전 세계 인력의 약 10퍼센트 감축을 예고하며 코로나19 백신 수요 둔화와 수익성 악화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입장이다. 허 연구원은 특허 절벽과 약가 인하 압박에 직면한 빅파마가 비용 구조를 재정비하기 위해 전사적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고 해석했다.

 

연구개발 전략도 조정되고 있다. 허 연구원은 특허 만료와 약가 하향이 가속되는 환경에서 빅파마가 고위험 혁신 신약보다는 일정 수준 검증된 기술과 타깃에 자본을 배분하는 경향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계열 내 최초를 노리는 퍼스트 인 클래스 신약이나 완전히 새로운 치료 접근법에 대한 장기·고위험 투자를 축소하고, 상대적으로 성공률과 상용화 가능성이 높은 모달리티로 포트폴리오를 옮기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구체적으로는 이중항체, 항체약물접합체 ADC, RNA 기반 치료제, 제형변경 플랫폼 등에서 투자와 기술 거래가 집중되는 모습이다. 이들 분야는 기존에 검증된 타깃이나 기전 위에 새로운 약물 전달 방식이나 결합 구조를 더해 효능과 안전성을 개선하는 전략으로, 완전히 미지의 타깃을 노리는 개발보다 임상 실패 리스크가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만 치료제 시장에서도 GLP 1 계열 약물을 중심으로 투여 주기, 복약 편의성을 개선하는 제형변경 기술에 자금이 몰리고 있다.

 

세포유전자치료제 영역에서도 선택과 집중이 이뤄지고 있다. 허 연구원은 제조 공정 효율성과 대량 생산 가능성, 투여 편의성을 갖춘 CAR T 플랫폼에 대한 인수합병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환자 맞춤형으로 제조해야 하는 기존 CAR T의 병원 내 생산 부담과 비용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기술이 우선적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의미다. 동시에 투여 주기가 길고 임상 성공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siRNA 치료제, 이미 승인된 타깃을 기반으로 설계된 이중항체 등에서 기술 도입과 라이선스 거래가 활발해지는 양상이다.

 

이 같은 전략 변화는 빅파마의 외부 의존도를 더욱 키우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내부 연구개발만으로는 특허 절벽과 매출 공백을 메우기 어렵게 되면서, 혁신 플랫폼을 보유한 바이오텍과의 기술 제휴나 인수합병을 통해 파이프라인을 빠르게 보강하려는 수요가 커지고 있다. 허 연구원은 최근 인수 프리미엄이 높아지는 추세와 함께, 인수 대상 기업을 둘러싼 경쟁 입찰과 법적 분쟁까지 발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짚었다.

 

실제 사례로 화이자와 노보노디스크의 멧세라 인수 경쟁, 룬드벡과 앨커미스가 아바델 인수를 두고 벌인 각축전이 소개됐다. 허 연구원은 이들 사례에서 빅파마가 상당한 리스크와 웃돈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격적인 인수전에 뛰어드는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망한 자산에 대해서는 높은 프리미엄이 정당화되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으며, 매도자 위치에 있는 바이오텍의 몸값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흐름이라는 분석이다.

 

그동안 내부 개발 비중이 높았던 화이자, 노바티스, 로슈 등도 올해 하반기 들어 파이프라인 외부 확충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다. 자체 연구 인프라와 자금력을 갖춘 이들 기업까지 본격적인 외부 기술 도입과 인수에 나선 것은, 빅파마 전반의 전략 축이 비용 절감과 선택적 M&A 중심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해석된다.

 

자본시장과의 연계성도 부각된다. 허 연구원은 바이오 기업 주가 상승과 기술 거래, 인수합병 활성화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관찰돼 왔다고 설명했다. 금리 수준과 거시경제 불확실성이 완화될수록 바이오텍의 밸류에이션 회복과 함께 자금 조달 환경이 개선되고, 이를 기반으로 기술이전과 대형 딜이 잇따르는 선순환이 형성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그는 2026년 이후 대외 불확실성 완화와 금리 인하가 이어질 경우 바이오텍 지수 회복과 함께 빅파마의 M&A 거래가 다시 한 번 증가하는 국면이 올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약가 규제 강화와 보험 재정 압박이 계속되는 한, 고위험 혁신 프로젝트보다는 수익 가시성과 성공 확률이 높은 자산 중심의 거래가 우세할 것으로 내다봤다.

 

제약바이오 업계에서는 향후 몇 년간 구조조정과 포트폴리오 재편, 공격적 인수합병이 동시에 전개되면서 산업 지형 자체가 크게 바뀔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들은 비용 절감과 기술 확보 경쟁이 맞물린 현 상황에서 어떤 기업이 시장에 안착할 수 있는 자산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느냐에 따라 글로벌 제약 순위지도가 재편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산업계는 약가와 규제 환경 속에서 진행되는 빅파마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 실제 혁신과 환자 접근성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배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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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파마#노보노디스크#화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