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얼이 연예계 재편"…플랫폼·엔터, XR로 새 먹거리 찾기
버추얼 아티스트와 스트리머가 가상 공간을 넘어 오프라인 공연장과 플랫폼 전면으로 진입하며 엔터테인먼트 산업 지형을 재편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확장현실 등 IT 기술을 앞세운 버추얼 스타들은 외모와 언어, 물리적 공간의 제약을 줄이며 실질적인 팬덤과 수익을 확보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국내외 엔터사와 플랫폼 기업은 버추얼 전용 오디션과 제작 스튜디오, 인프라 투자를 앞다퉈 확대하며 차세대 먹거리이자 XR 시장 성장의 핵심 콘텐츠로 버추얼 IP를 띄우는 전략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플레이브는 버추얼 아티스트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 입성하며 성장 가능성을 입증했다. 2023년 데뷔한 이 그룹은 지난달 21일부터 이틀간 고척돔에서 콘서트를 열어 누적 약 3만7000석을 채웠다. 대만, 홍콩,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등 6개국을 도는 첫 아시아 투어를 마친 뒤 앵콜격으로 기획된 공연에서 실제 아이돌과 다르지 않은 티켓 파워를 보여준 셈이다. 업계는 공연 수익뿐 아니라 음원, 굿즈, 팬덤 플랫폼 연계까지 포함하면 버추얼 IP의 수익 구조가 점차 정교해지는 흐름으로 보고 있다.

SOOP이 보여주는 지표는 시장 변화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SOOP 버추얼 카테고리의 전체 평균 방송 수는 2022년 카테고리 신설 이후 약 550퍼센트 늘었다. 이에 맞춰 플랫폼은 버추얼 스트리머 온보딩 프로그램 웰컴 버추얼을 운영하며 신규·이적 스트리머의 정착을 돕고 있다. 모션캡처 스튜디오 대관, 가상현실 장비 대여 등 인프라 지원을 병행해 개인 단위 창작자가 고퀄리티 버추얼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도록 생태계 전반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버추얼 아티스트가 대중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보여주자 엔터사는 전통적인 연습생 발굴 체계에 IT 기술을 접목한 버추얼 전용 모델을 시도하고 있다. 지드래곤 소속사 갤럭시코퍼레이션이 추진하는 버추얼 아티스트 오디션은 그 전형적 사례다. 이 회사는 AI 엔터테크 기업을 표방하며 지드래곤에 이은 차기 소속 아티스트를 XR 기반 버추얼 아이돌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갤럭시코퍼레이션이 최근 서울에서 진행한 오디션의 특징은 완전 블라인드 구조다. 참가자와 심사위원은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참가자는 별도 공간에서 전문 촬영 장비로 구현된 아바타를 통해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참가자의 손짓과 시선, 호흡에 따른 세밀한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아바타에 반영되고, 무대 중앙 대형 스크린에 구현된 얼굴 표정과 동작을 통해 실제 공연과 유사한 퍼포먼스가 재현됐다. 심사위원은 다른 방에서 목소리와 아바타 퍼포먼스만을 보고 실력을 평가했다. 외형과 배경이 배제된 채 퍼포먼스와 보컬, 표현력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 구조다.
이 회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일본 오사카에서도 동일한 형태의 버추얼 오디션을 운영했다. 기존 아이돌 육성 모델이 외모, 국적, 기획사 네트워크 등 다양한 비기술적 요소에 좌우됐던 것과 달리 XR 기술 기반 버추얼 오디션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실력 중심 평가 시스템을 설계했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있다. 참가자 입장에서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외형의 캐릭터로 무대에 설 수 있어 심리적 부담이 줄어들고 표현의 폭도 넓어진다.
한 참가자는 외모 콤플렉스로 아이돌 꿈을 접었던 경험을 언급하며, 7년 만에 다시 오디션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잘생긴 캐릭터로 무대에 서면서 자신감이 붙고, 노래 실력도 더 자연스럽게 발휘됐다는 평가다. XR을 통한 아바타 구현이 단순 이미지 치장이 아닌, 퍼포머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도구로 작동하는 셈이다.
최용호 갤럭시코퍼레이션 대표는 사람이 언어 등 여러 물리적 한계를 갖고 있다고 설명하며, 버추얼 아이돌이 이러한 제약을 줄이는 수단이 될 것으로 본다. AI를 결합하면 다국어 소통이 가능해지고, 시간대나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글로벌 팬 소통도 손쉽게 기획할 수 있다. 병역, 스캔들, 개인 건강 문제, 계약 분쟁 등 오프라인 스타에게 빈번하게 발생하는 리스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점도 기획사 측에는 중요한 요소다. 기술 발전에 따라 아바타를 진화시키고, 콘텐츠를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장기 운영이 가능한 IP라는 점은 비용 구조 측면에서도 매력 요인으로 거론된다.
스트리밍 플랫폼들은 이런 변화를 성장 기회로 보고 있다. SOOP은 버추얼 스트리머에 대한 이용자 수요와 시청 시간이 빠르게 늘자 VR 맵과 아바타 등 버추얼 콘텐츠 제작을 위한 지원을 올 초부터 본격화했다. 모바일 앱에는 버추얼 모드를 도입해 방송 전 간단한 설정만으로 아바타 방송을 시작할 수 있게 했다. 기술 진입 장벽을 낮춰 진입자 풀을 키우겠다는 전략이다.
SOOP은 버추얼 스트리머의 아이돌 데뷔를 표방한 프로젝트 V REAL과 3D 아바타 제작 지원 프로그램 버추얼 메이크오버도 가동하고 있다. 연말 시상식에서는 버추얼 스트리머 전용 레드카펫인 블루 카펫을 운영해 버추얼 스트리머를 정식 크리에이터로 예우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플랫폼 내에서 버추얼 크리에이터를 주변 카테고리가 아니라 주력 콘텐츠 라인업으로 끌어올리려는 행보다.
네이버 역시 치지직을 통해 버추얼 콘텐츠를 차세대 성장 축으로 낙점했다. 지난해 5월 정식 출시한 치지직에서 버추얼 스트리머 비중은 수량 기준으로는 전체의 약 20퍼센트에 그치지만, 시청 시간과 이용자 반응 등 주요 지표에서는 이미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업계는 파악한다.
네이버는 올 초 사옥 1784에 가상 배경 스튜디오인 비전스테이지와 3차원 콘텐츠 전문 제작 스튜디오인 모션스테이지를 갖춘 버추얼 프로덕션 스튜디오를 조성했다. XR 콘텐츠를 원스톱으로 기획, 촬영, 후반 작업까지 처리할 수 있는 체계를 내부에 구축해 버추얼 크리에이터와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차별화된 제작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구상이다.
해외 거점도 늘리고 있다. 네이버는 베트남 호찌민에 XR 콘텐츠 제작 전담 조직 베트남비주얼익스피어리언스를 신설했다. 베트남이 콘텐츠 제작 인력 수급 환경과 디자인 및 3D 제작 역량 성장 속도, 글로벌 기업 제작 센터가 형성된 생태계 등에서 제작 환경과 운영 측면 모두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결과다. 이미 베트남 개발센터가 운영 중인 만큼, 초기 구축에 필요한 물리적 허들이 낮고 기회 비용도 적다는 점이 고려됐다. 회사 측은 이를 미디어 프로덕션 전반의 기술 역량 확보를 위한 준비 단계로 설명하며, 향후 버추얼 IP 제작 및 고도화의 거점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네이버는 안드로이드 XR 기반 앱 치지직 XR도 출시했다. 향후 삼성전자 XR 기기 갤럭시 XR과 연동해 버추얼 스트리머와 아티스트를 앞세운 몰입형 콘텐츠를 제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XR 기기에서 구현 가능한 360도 환경, 입체 음향, 실시간 인터랙션 등을 버추얼 아바타와 결합하면 기존 2차원 스트리밍과는 다른 체험형 팬덤 플랫폼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장 조사 기관 그랜드뷰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버추얼 인플루언서 시장 규모는 약 60억6000만 달러, 한화로 약 9조원 수준으로 추정된다. 2024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복합 성장률은 40퍼센트를 넘는 40.8퍼센트로 관측되며, 2030년에는 약 458억8000만 달러, 한화 약 68조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시장도 추정치상 연평균 성장률 43퍼센트를 기록하며 2030년 기준 약 22억6780만 달러, 한화 3조3600억원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버추얼 인플루언서의 성장은 XR과 AI, 모션캡처, 실시간 렌더링 엔진 등 기술 발전과 맞물려 있다. 플레이브, 이세계아이돌 등 초기 성공 사례들은 공연, 음원, 굿즈 판매라는 전통적 엔터 비즈니스 모델에 버추얼 IP를 결합해 수익 구조를 검증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동시에 플랫폼 사업자는 스트리밍, 후원, 광고, 팬덤 구독 서비스 등을 결합해 버추얼 크리에이터 기반의 고마진 디지털 수익 모델을 구축할 여지가 커지고 있다.
다만 버추얼 아티스트의 상용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만큼, 초상권과 저작권, AI 생성 콘텐츠의 소유권 문제, 가상 인물에 대한 허위 광고와 팬 기만 행위 등 새로운 규제 과제도 등장하고 있다. 실제 인물과 유사한 외형을 지닌 아바타를 활용할 경우, 당사자 동의와 초상권 침해에 대한 기준이 정교하게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플랫폼 차원에서는 버추얼 콘텐츠가 미성년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알고리즘 상에서 특정 유형의 아바타가 과도하게 노출되며 편향을 강화하는 문제를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업계는 버추얼 인플루언서를 XR 시장 확장의 핵심 콘텐츠로 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버추얼 스트리머와 아티스트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넘어 플랫폼 경쟁력까지 좌우하는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시간 번역과 다국어 대응, 24시간 운영 가능한 가상 캐릭터의 특성이 글로벌 팬덤 확대와 직결되면서, 기술과 콘텐츠, 플랫폼이 결합된 버추얼 비즈니스가 차세대 성장 축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엔터테인먼트와 플랫폼 업계는 향후 버추얼 스타들이 실제 시장에 얼마나 안정적으로 안착할지, 또 이용자들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어떻게 수용할지에 주목하고 있다. 기술과 윤리, 산업과 제도 간 균형을 어떻게 맞추느냐가 버추얼 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 조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