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중국제휴에 125억달러…글로벌 빅파마 기술지도 재편
AI와 다중 항체 기술이 결합한 신약개발 패러다임 전환 속에서 중국 바이오기업이 세계 기술 거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빅파마가 중국 파트너를 앞세워 초기 단계 파이프라인을 확장하는 동시에, 이중·다중 항체와 AI 기반 신약 발굴 플랫폼에 대한 베팅을 강화하는 흐름이다. 업계는 올해 기술 거래 양상이 향후 글로벌 제약바이오 투자 방향과 파이프라인 전략을 가늠하게 하는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4일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가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딜포마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체결된 상위 10대 R&D 기술 거래는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수렴했다. 초기 단계 파이프라인에서 중국 기업의 존재감이 커졌고, 이중·다중 항체 플랫폼 거래가 늘었으며, AI 기반 신약 발굴 기술에 대한 의존도도 뚜렷이 높아졌다.

거래 규모 기준 상위 10건 중 절반인 5건이 중국에 기반을 둔 기업과 체결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안에는 AI를 활용한 초기 단계 공동 연구 협력과 항체 치료제 관련 파트너십이 함께 포함된다. 대표적으로 아스트라제네카와 CSPC파마의 AI 기반 초기 단계 협력, 도브트리와 엑스탈피의 AI 플랫폼 제휴가 기술 탐색 단계에서의 중국 역할을 보여준다. 항체 부문에서는 화이자와 3S바이오, 아스트라제네카와 하버바이오메드 간 파트너십이 포함됐다.
중국 바이오기업과 빅파마 사이의 거래는 규모 면에서도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올해 계약 선급금이 5천만달러 이상인 거래 가운데 38퍼센트가 중국 기업에 귀속됐다. 이는 전체 글로벌 기술 거래에서 선급금 기준으로 약 30퍼센트를 중국이 가져간 셈으로, 단순 지역 라이선스가 아닌 핵심 파이프라인 중심 거래에 중국이 깊숙이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가장 큰 거래는 GSK와 중국 헝루이파마가 체결한 125억달러 규모 계약이다. GSK는 이 계약을 통해 만성폐쇄성폐질환 대응을 위해 개발 중인 PDE3·4 저해제의 중국 외 글로벌 권리를 확보했다. 다국적 제약사가 중국에서 발굴된 초기 자산을 글로벌 주력 파이프라인으로 편입하는 구조가 본격화된 사례로 해석된다.
항체 치료제 분야에서는 이중·다중 항체가 성장 축으로 부상했다. 올해 상위 10대 계약 중 3건이 이중 혹은 다중 항체 관련 거래였다. 이중 항체는 서로 다른 두 표적을 동시에 인식하는 항체를 말하며, 다중 항체는 세 개 이상 표적을 노리는 플랫폼을 의미한다. 기존 단일 항체에 비해 종양 미세환경 조절, 면역세포 활성화 등에서 복합적인 기전 설계가 가능해 항암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딜포마에 따르면 지난해 이중·다중 항체 기술 거래는 33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도 10월까지 이미 24건이 체결돼 전년 수준에 근접했다. 특히 종양학 영역에서는 이중 특이 항체가 가장 활발한 라이선스 분야로 자리 잡았고, 올해 발표된 관련 거래의 선불금 합계는 28억달러, 전체 잠재 거래액은 174억달러를 넘겼다. 기존 세포독성 항암제 위주의 포트폴리오를 다중기전 면역항암제로 재편하려는 빅파마 전략이 수치로 드러난 셈이다.
AI 기반 신약 개발 거래도 질적·양적 확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딜포마 집계에 따르면 AI 기반 타깃 식별과 후보물질 발굴을 골자로 한 거래는 2017년 이후 누적 513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120건이 올해 체결돼, 전체의 23퍼센트를 차지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AI가 전임상 R&D 초기 단계에서 사실상 필수 도구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빅파마는 AI를 활용해 전임상 후보물질 탐색과 최적화에 들던 시간을 줄이고, 합성 가능성·독성·약동학 등 핵심 지표를 사전에 시뮬레이션하면서 비용 구조를 개선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다. 특히 암, 면역질환, 중추신경계 질환과 같이 기존 방식으로는 표적 발굴이 어려웠던 영역에서 AI 기반 타깃 예측과 구조 설계의 활용도가 빠르게 높아지는 흐름이다.
대표적인 예가 도브트리와 엑스탈피 간 60억달러 규모 거래다. 엑스탈피는 AI, 양자 계산, 로봇 자동화가 결합된 플랫폼을 통해 소분자, 항체, 다중모달 물질을 설계·합성·평가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도브트리는 이 플랫폼을 도입해 다수 질환 분야에서 초기 후보물질을 일괄적으로 발굴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단발성 프로젝트를 넘어, AI 인프라를 외부에서 조달해 장기 파이프라인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다.
노바티스와 몬테로사 테라퓨틱스의 57억달러 규모 계약도 AI 접목 흐름을 보여준다. 양사는 면역질환을 대상으로 분자접착분해제 기술을 공동 개발하고 있는데, 단백질 간 상호작용을 조정해 표적 단백질을 선택적으로 분해하는 이 플랫폼에 AI와 머신러닝 기반 설계 엔진을 접목했다. 기존에는 구조 규명과 리간드 설계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수반됐던 단백질 분해 치료제 분야에서, 설계 자동화와 후보군 스크리닝 효율화를 꾀한 사례로 평가된다.
다만 AI 신약 개발 분야의 재무 구조는 여전히 보수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AI 신약 계약의 선급금 총액은 작년 2억달러에서 올해 8억달러 수준으로 크게 늘었지만, 전체 기술 거래 선급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3퍼센트에 그쳤다. 딜포마는 대형 제약사가 AI 기반 플랫폼의 장기적 잠재력에는 동의하면서도, 임상 성공률과 실제 매출 창출까지 이어지는 경로가 검증되지 않은 만큼 선급금보다는 마일스톤과 로열티에 무게를 두는 구조를 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비교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약진은 후보물질 발굴과 초기 임상 단계에 집중되는 모습이다. 미국과 유럽이 여전히 후기 임상과 허가, 상업화 단계에서 우위를 보유하고 있지만, 중국은 방대한 환자 기반과 규제 속도, 공격적인 자본 투입을 내세워 초기 자산을 빠르게 축적하고 있다. 특히 이중·다중 항체와 ADC, CAR T 등 고부가가치 면역항암 플랫폼에서 중국 기업이 빅파마와의 대형 라이선스 아웃을 연달아 체결하면서, R&D 가치사슬 상단 구조가 다시 짜이는 분위기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는 기회와 부담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 중국 기업이 초기 파이프라인과 플랫폼 거래를 선점할수록, 한국 기업은 특정 질환군이나 기전에서 차별화된 니치 기술을 확보하거나, 임상개발·데이터 관리 역량을 앞세운 공동개발 모델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경쟁 여지가 생긴다. AI 신약 개발에서도 글로벌 상위 플랫폼 기업과 직접 경쟁하기보다는, 한국 병원 네트워크와 실제 임상 데이터를 활용한 특화형 모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규제·정책 측면에서도 변화 대응이 관건이다. AI 기반 후보물질과 다중 항체 치료제는 임상 설계와 안전성 평가 방식에서 기존 가이드라인과 다른 접근이 요구되기 때문에, 각국 규제 당국의 평가 기준과 데이터 제출 요건이 R&D 전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AI가 설계한 분자의 독성 예측, 오프타깃 효과, 장기 안전성에 대한 검증 프레임워크를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상용화 속도 격차도 벌어질 수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올해 드러난 기술 거래 패턴이 향후 5년간 글로벌 R&D 자본 흐름을 규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바이오 투자 분석가는 중국 바이오기업의 초기 단계 존재감이 커질수록, 빅파마 입장에서는 리스크 분산과 포트폴리오 다변화 측면에서 선택지가 늘어나지만 한국을 포함한 기타 국가 기업 입장에서는 진입장벽이 높아지는 효과도 있다며, AI와 항체 플랫폼 역량을 얼마나 조기에 고도화하느냐가 기술 수출 전략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계는 중국·AI·다중 항체를 축으로 재편되는 글로벌 기술 거래 지형 속에서, 각국 기업의 포지셔닝과 규제 환경이 실제 수익 구조로 이어질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