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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가운데 황금빛 억새가 출렁인다”…서울 마포에서 찾는 자연과 문화의 여유

강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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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를 찾는 발걸음이 달라졌다. 예전엔 홍대 앞 번화가와 카페 거리가 먼저 떠올랐다면, 지금은 한강과 공원, 오래된 시장과 전시 공간을 함께 누비는 하루 코스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바쁜 도심 속에서도 자연과 문화, 일상의 온기를 동시에 느끼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커진 셈이다.

 

요즘 마포를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 중 하나가 상암동 하늘공원이다. 한때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가 억새와 바람이 머무는 생태 공원으로 변신했다. 가을이면 드넓은 억새밭이 황금빛 물결처럼 일렁이고, 겨울에는 눈 쌓인 언덕이 고요한 흑백의 풍경을 만든다. 정상에 오르면 한강과 서울 도심, 멀리 북한산까지 한눈에 들어와 답답했던 시야가 탁 트인다. 계단을 오르며 숨이 조금 가빠져도, 바람에 실려 오는 억새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먼저 느긋해진다.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출처=한국관광공사
출처=한국관광공사

이런 변화는 숫자가 아닌 풍경으로 확인된다. 한강을 사이에 둔 마포의 공원과 숲길은 주말마다 돗자리를 펼친 가족, 운동을 나선 중장년, 사진을 찍는 연인들로 천천히 채워진다. 멀리 떠나는 여행 대신, 도시 안에서 가능한 짧은 산책과 가벼운 나들이가 새로운 휴식의 방식이 된 셈이다.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자연과 맞닿고 싶은 마음이 하늘공원 같은 공간에 사람을 모으고 있다.

 

마포의 얼굴은 자연에서 끝나지 않는다. 망원동에 자리한 망원시장은 이 동네 특유의 생활 온도를 보여주는 곳이다. 약 40년의 역사를 지닌 시장 골목에는 농수산물과 분식, 생활잡화가 빼곡히 들어섰다. 215미터 길이의 아케이드 덕분에 비가 와도 발걸음이 머뭇거리지 않는다. 시장 초입에서는 갓 튀겨낸 튀김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안쪽에서는 반찬을 고르는 손님과 상인의 짧은 안부 인사가 오간다.

 

망원시장은 전통 시장이지만, 머무는 사람의 얼굴은 젊다. 교통이 편리해 주변 동네 거주자뿐 아니라 나들이객도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다. T머니 결제 시스템을 도입해 현금이 없어도 부담 없이 장을 볼 수 있고, 신혼부부와 싱글족을 겨냥한 소량 포장, 새로운 분식 메뉴도 눈에 띈다. 장바구니 대신 작은 에코백을 든 손님이 많아진 것도 달라진 풍경이다. 한 상인은 요즘 손님들이 “맛도 맛이지만, 시장의 분위기를 즐기러 온다”고 표현했다고 전했다. 값싼 장터가 아니라, 생활의 리듬을 느끼는 산책 코스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문화 공간도 마포를 특별하게 만든다. 동교동에 위치한 뮤씨엄 X 오뮤지엄은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이들이 찾는 전시관이다. 에반게리온처럼 특정 작품을 전면에 내세운 테마 전시가 시즌별로 열려, 관람객은 한때 화면 속에서만 보던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최신 기술을 활용한 연출과 몰입감 높은 설치 작품들은 익숙한 애니메이션을 전혀 다른 감각으로 보게 만든다. 전시 내용이 수시로 바뀌어, 같은 장소라도 다시 방문할 이유가 생긴다.

 

애니메이션 전시는 특정 세대의 취향을 넘어, 서로 다른 세대의 기억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부모 세대가 청춘 시절에 보았던 작품을 자녀에게 보여주며 추억을 나누고, 친구끼리 좋아하던 장면을 다시 이야기하며 웃음을 나눈다. 전시장이 단순한 관람 공간을 넘어, 취향을 공유하고 감정을 건네는 작은 거실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연남동의 경의선숲길은 이런 마포의 여러 얼굴을 유연하게 이어준다. 한때 기찻길이었던 자리를 따라 조성된 이 숲길은 길게 뻗은 산책로와 나무가 어우러진 도시 속 녹색 통로다. 어느 계절에 찾느냐에 따라 풍경도 분위기도 달라진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아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들고 천천히 걷는 사람들의 걸음이 가볍다. 길을 따라 자리한 작은 카페와 상점들은 숲길을 걷는 이들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붙잡는다.

 

경의선숲길은 누군가에게는 출퇴근길이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산책 코스다. 번잡한 대로변을 한 블록 사이에 두고도, 숲길 안에서는 대화 소리와 자전거 바퀴 소리, 반려견 목줄이 살짝 흔들리는 기척만 잔잔하게 들린다. 혼자 걷는 이도,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걷는 이도 각자의 속도로 길을 채운다. 전문가들은 이런 도시형 숲길을 “생활 반경 안에서 스트레스를 낮추는 완충 지대”라고 부르며, 일상에서 반복 가능한 짧은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마포를 찾는 사람들의 반응은 온라인에서도 분명하다. “하루에 하늘공원 억새 보고, 망원시장 먹거리로 배 채우고, 경의선숲길 걷고, 전시까지 보고 왔다”는 식의 인증 글이 이어진다. 먼 여행을 준비하지 않아도, 도시 안에서 자연과 맛, 취향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울살이의 작은 보너스 같다”는 표현도 나온다. 나들이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고도, 새로운 풍경과 낯선 공기를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 사람들을 다시 이 동네로 부른다.

 

도시의 자연과 시장, 전시 공간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지니지만, 마포에서는 하나의 코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숲길을 걷다가 시장으로 향하고, 전시를 보고 난 뒤 공원을 찾는 식의 루트가 어느새 많은 이들의 ‘주말 공식’이 돼가고 있다. 작고 사소한 선택처럼 보이는 동네 나들이이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은 “도시에서도 숨 쉴 틈을 찾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확인한다. 지금 마포에서 시작되는 이 변화는, 바쁘게 살아가는 모두가 조금 더 나답게 숨 쉬고 싶어 하는 마음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강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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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공원#망원시장#경의선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