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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뇌혈관질환 R&D 전주기 투자…국가전략 없인 의료격차 심화 우려

허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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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뇌혈관질환이 국내 주요 사망원인으로 굳어진 가운데, 고령화와 지역 의료격차가 겹치며 사회·경제적 부담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 고령층에 집중돼 있던 발병이 30대부터 50대까지 확산되는 양상도 뚜렷하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예방부터 진단, 치료, 예후 관리까지 전주기에 걸친 국가 차원의 실증·임상 중심 연구개발 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기술 개발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의료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데이터와 임상 근거를 축적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업계와 의료계에서는 심뇌혈관질환 대응 전략이 향후 국내 보건의료 시스템의 경쟁력을 좌우할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3일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발간한 심뇌혈관질환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심장질환과 뇌혈관질환 발생은 수명 연장과 고령 인구 증가에 비례해 꾸준히 늘고 있다. 통계청 자료 기준 국내 전체 사망원인 중 심장질환과 뇌혈관질환은 각각 2위와 4위를 기록했다. 지난 20년간 5대 주요 사망원인에서 빠지지 않는 질환군으로, 2023년 기준 인구 10만명당 심장질환 사망자는 65.7명, 뇌혈관질환 사망자는 48.2명에 달한다. 두 질환을 합치면 전체 사망의 16.3%를 차지해 악성신생물에 이어 높은 수준이다.

질병관리청 통계에서도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심근경색 발생 건수는 2012년 2만3509건에서 2022년 3만4969건으로 증가했고, 뇌졸중은 같은 기간 10만673건에서 11만574건으로 늘었다. 발병 자체가 늘어난 만큼 발병 후 30일 이내와 1년 이내 사망률도 동반 상승하는 추세다. 사망률은 연령에 따라 격차가 크다. 심뇌혈관질환 사망률은 20세부터 29세 구간에서 약 3.8% 수준이지만, 80세 이상에서는 17.8%로 4배 이상 뛰어오른다. 보고서는 최근 30대에서 50대에서도 사망률 증가가 관찰되고 있어, 더 이상 노인성 질환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고 해석했다.

 

보고서는 특히 지역 간 의료 인프라 격차가 심뇌혈관질환의 실질적 치명률을 높이는 핵심 요인이라고 짚었다. 중증·응급 심뇌혈관질환 치료는 CT·MRI, 심혈관 조영장비 등 시설과 장비도 중요하지만, 전문의와 숙련된 팀 기반 대응 역량에 대한 인력 의존도가 높다. 수도권과 대도시에 비해 지방은 심장내과, 신경과, 응급의학과 등 전문 의료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가 어렵고, 이로 인해 24시간 즉각 대응 체계를 갖추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수치로도 격차가 드러난다. 2022년 기준 인구 10만명당 심근경색 발생률은 전남 53.4명, 광주 45.2명으로 서울의 34.9명보다 높다. 뇌졸중 발생률 역시 전북 134.5명, 충북 131.2명으로 서울 101.6명을 크게 웃돈다. 보고서는 같은 질환이라도 발생률과 사망률이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점에 주목하면서, 응급 이송 체계, 전문 치료 인력, 재활과 예후 관리 인프라 등 의료 시스템 전반에서 지역 간 불균형이 반영된 결과로 분석했다.

 

진흥원은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심뇌혈관질환 대응 연구가 여전히 기초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평가했다. 유전자, 바이오마커, 병태생리 연구 등 개별 과제 중심의 기초연구는 활발하지만, 실제 환자 진료에 적용 가능한 예측 알고리즘, 신속 진단 기술, 디지털 기반 예후 관리 솔루션 등은 임상적 검증과 현장 실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심근경색과 뇌졸중은 발병 후 골든타임 내 치료 여부가 예후를 좌우해, 환자 도착 전 단계부터 병원 내 진단과 시술, 퇴원 후 관리에 이르는 연속적 데이터를 활용한 기술 개발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해외는 이미 국가 단위로 이러한 기술·임상 연계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영국, 일본 등 주요 국가는 법적 근거와 국가 정책을 바탕으로 심뇌혈관질환 전주기 대응체계를 정비하고, 이를 뒷받침할 연구개발 전략을 가동 중이다. 미국은 심장질환·뇌졸중 등록 사업과 대형 코호트 기반 R&D를 연계하고 있고, 영국은 국가보건서비스 중심으로 환자 데이터를 표준화해 정밀의료 연구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일본 또한 고령사회 전략의 핵심 축으로 심뇌혈관질환 관리 정책을 배치하며 관련 기술개발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영상 판독, 심전도·혈압 모니터링, 예후 예측 솔루션 등이 심장질환과 뇌졸중 분야에서 빠르게 상용화 경쟁에 들어간 상황이다.

 

반면 국내는 관련 연구가 분절적으로 진행돼 상용화 및 의료 현장 도입 속도가 더디다는 평가다. 보고서는 특히 질환 예측과 조기 진단 기술 개발을 확대하고,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임상 근거를 의료현장에서 직접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자의무기록과 응급의료 빅데이터, 건강보험 청구 데이터 등을 연계해 AI 기반 위험도 예측 모델을 개발하고, 이를 권역 심뇌혈관질환센터와 지역 병원에서 실증하는 구조가 대표적 예로 제시됐다. 디지털 치료제나 원격 모니터링 솔루션과 결합한 퇴원 후 관리 모델 또한 유효한 연구축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정책 과제도 분명하다. 보고서는 취약지역의 의료 격차 해소를 위한 타깃형 연구와 인프라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우선 지역별 심뇌혈관질환 위험군을 체계적으로 선별할 수 있는 기준과 알고리즘을 마련하고, 해당 지역 인구 구조와 생활 습관, 의료 이용 패턴을 반영한 맞춤형 진료 프로토콜 개발이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응급 상황 대응부터 퇴원 후 재활과 재발 방지까지 이어지는 연속적 치료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재발 방지를 위한 장기 추적 관리 체계는 지역 간 사망률 격차를 줄이는 데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진흥원 관계자는 보고서를 통해 심뇌혈관질환 연구가 기초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임상 적용을 전제로 설계된 국가 R&D 프로그램으로 재편돼야 한다며, 예방·진단·치료·예후 관리 전단계에 걸친 데이터 통합과 현장 실증이 이뤄질 때 비로소 실질적 사망률 감소와 의료격차 완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보건의료계에서는 심뇌혈관질환 대응 전략과 이를 뒷받침할 연구개발 투자 방향이 앞으로의 정밀의료,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 구도에도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산업계는 이번 보고서를 계기로 제시된 과제가 실제 정책과 예산에 반영돼 심뇌혈관질환 관리 체계가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허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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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건산업진흥원#심뇌혈관질환#지역의료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