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 관세 압박에 미국 생산 확대”…일라이릴리, 앨라배마 비만치료제 공장 신설로 공급망 재편
현지시각 기준 9일, 미국(USA) 앨라배마주 헌츠빌에서 글로벌 제약사 일라이 릴리(Eli Lilly)가 대규모 생산시설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조치는 비만치료제 수요 급증과 함께 미국 내 관세 부과 가능성에 대비한 공급망 재편이라는 점에서 국제 제약·무역 질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예고하고 있다. 미 정부의 의약품 가격 인하·리쇼어링 압박 속에서 다국적 제약사의 대응 전략이 본격화하는 흐름이다.
일라이 릴리는 이날 60억달러(약 8조8천억 원) 이상을 투입해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신규 생산시설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헌츠빌 공사는 내년에 착공해 2032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올해 2월 회사가 발표한 미국 내 투자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다. 당시 일라이 릴리는 미국에서 생산시설 4곳을 짓기 위해 최소 270억달러(약 39조7천억 원)를 투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회사 측은 헌츠빌 공장이 해당 투자 패키지 가운데 세 번째 신규 생산거점이라고 설명했다. 새 공장은 저분자 합성 의약품과 펩티드 의약품을 생산하는 역할을 맡게 되며, 특히 자사가 개발 중인 첫 경구용 GLP-1 비만치료제 ‘오르포글리프론(Orforglipron)’의 핵심 공급 기지로 설계된다. 이미 비만치료제 ‘젭바운드(Zepbound)’로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넓힌 일라이 릴리는, 오르포글리프론이 내년 초 미국 당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을 고려해 조기 증설에 나섰다고 밝혔다.
이번 투자에는 통상정책 리스크에 대한 대응 논리도 반영됐다. 일라이 릴리는 헌츠빌 공장 건설이 의약품 수입에 관세가 부과될 가능성에 대비한 성격을 가진다고 언급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내 생산 확대를 요구하면서 관세를 압박 수단으로 활용해온 만큼, 미국 내 생산 비중을 높여 가격·관세 리스크를 줄이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데이비드 릭스 일라이 릴리 최고경영자(CEO)는 헌츠빌 투자가 원료의약품(API)의 미국 내 생산을 확대해 공급망 회복력을 높이고, 대외 충격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투자의 지역 경제 파급효과도 주목된다. 일라이 릴리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투자액의 최대 4배에 달하는 경제활동이 창출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케이 아이비 앨라배마 주지사는 헌츠빌 공장을 “우리 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초기 투자”라고 평가하며 적극적인 환영 의사를 밝혔다. 앨라배마주 입장에서는 고용 확대와 제조업 기반 고도화, 바이오·제약 클러스터 육성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일라이 릴리는 헌츠빌 공장 운영 전반에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고, 머신러닝과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해 생산 효율을 높이겠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고도 자동화 설비와 데이터 기반 품질 관리 시스템을 통해 대량 생산과 비용 절감을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미국 내 생산거점을 새로 구축하면서 첨단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는 최근 흐름과 맞물린다.
국제 제약 업계 전반에서는 미국 정부의 정책 변화가 생산기지 재편의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글로벌 제약사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내 의약품 생산 확대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이후 미국 시장에 대한 제조 투자를 늘려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제약사들이 미국에서 판매하는 의약품 가격을 다른 선진국 수준으로 낮추도록 압박하는 과정에서 관세를 지렛대로 활용해왔고, 이러한 압박이 해외 생산 중심 구조를 미국 내 생산으로 옮기는 촉매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격정책과 관세 혜택을 연계한 협상도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일라이 릴리와 덴마크(Denmark)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Novo Nordisk)가 미국 내 비만치료제 가격 인하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신 이들 제약사가 3년간 관세 면제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가격 인하와 관세 감면을 맞교환하는 방식의 정책 운용을 시사했다. 글로벌 제약사 입장에서는 미국 시장에서의 가격 압박을 수용하는 대신, 관세와 규제 리스크를 낮추고 대규모 투자 인센티브를 확보하는 전략적 선택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이번 헌츠빌 공장 투자는 비만치료제 시장의 급팽창이라는 산업 구조 변화와, 미국의 보호무역·리쇼어링 기조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내 생산 확대는 단기적으로는 일라이 릴리의 공급망 안정을 돕고, 앨라배마 지역 경제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다른 글로벌 제약사들의 미국 투자 확대를 자극해, 의약품 공급망이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을 가속할 수 있다는 관측도 힘을 얻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미국 대선과 의약품 가격·관세 정책 변화에 따라 제약사의 투자 방향과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가 다시 조정될 여지가 크다고 본다. 관세와 규제를 매개로 한 미 정부와 제약업계 간 협상이 어떤 형태로 계속될지, 그리고 일라이 릴리의 헌츠빌 공장이 글로벌 비만치료제 공급 체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국제사회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