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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보안법 후폭풍”…K바이오, 중국 공백 메운다

배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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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중국 바이오 기업과의 거래를 제한하는 생물보안법을 통과시키면서 글로벌 바이오 공급망의 지형 변화가 본격화되고 있다. 중국 기업이 장악해온 미국 내 바이오 장비와 서비스 시장의 공백을 두고 한국과 인도, 일본, 유럽 기업의 수주 경쟁이 거세질 것으로 관측된다. 국내에서는 CDMO와 바이오 소부장 기업들이 수혜 후보로 지목되지만, 미국의 대중국 견제 강화가 장기적 규제 리스크로 작용할 여지도 제기된다. 업계는 이번 법 시행을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바이오 영역으로 본격 확산되는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19일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8일 현지 시간 생물보안법 조항이 포함된 국방수권법안에 최종 서명했다. 작년 초 발의된 후 일부 수정돼 올해 다시 제출된 생물보안법안이 약 2년 만에 국방수권법에 편입되는 형태로 효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로써 중국을 포함한 외국 적대국 연계 바이오 기업에 대한 미국 정부 조달과 계약 제한이 법제화됐다.

법의 핵심은 미국 연방정부와 산하기관이 지정된 우려 바이오 기업이 생산하거나 제공하는 장비와 서비스를 조달할 수 없도록 막는 데 있다. 국방수권법 발효 후 1년 안에 미국 관리예산국 OMB가 우려 바이오기업 명단을 공표해야 하며, 해당 리스트를 토대로 연방조달규정 개정과 계약 제한이 단계적으로 이행된다. 바이오경제연구센터는 우려기업 명단 공개 시점을 기준으로 글로벌 바이오 밸류체인의 실질적인 재편이 시작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려 바이오기업 지정 범위도 넓게 설정됐다. 첫째, 국방권한법 1260H 규정에 따라 매년 미국 국방부가 연방관보에 공표하는 미국 내 중국군사기업이 우선 포함된다. 둘째, 외국 적대국 정부를 대신해 행정적 거버넌스 구조나 지시, 통제를 받거나 운영되는 기관, 바이오 장비와 서비스의 제조·유통·제공·조달에 일정 부분 관여하는 기관, 미국 국가 안보에 위험을 줄 수 있는 기관이 모두 지정 대상이다. 셋째, 이들 법인의 자회사와 모회사, 계열사, 승계 회사도 연쇄적으로 제재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법이 실제 시장에 영향을 미치려면 연방조달규정 반영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일정이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특정 우려기업으로 분류될 경우 관련 조달·계약·대출·보조금 금지 규정은 연방조달규정 개정 60일 뒤부터 시행된다. ‘기타 우려기업’으로 지정된 경우는 90일 뒤 발효된다. 다만 기타 우려기업과 이미 체결된 기존 계약에 따라 생산되거나 제공 중인 바이오 장비와 서비스에 대해서는 최대 5년간 유예 기간이 부여돼, 갑작스러운 공급 중단에 따른 혼란은 일정 부분 완충될 전망이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유예 기간과 별개로 중국 주요 기업들을 둘러싼 심리적·정책적 디커플링이 속도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 바이오경제연구센터는 국방부가 1260H 조항에 따라 이미 유전체 분석 서비스 기업 BGI와 MGI Tech를 명단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해외 언론이 중국 대형 위탁개발생산기업 우십앱텍을 잠재적 지정 대상으로 거론하고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유전체 분석과 CDMO 영역의 대표적 중국 기업들이 생물보안 리스크의 초점이 되고 있어, 미국 내 발주와 파트너십 재조정이 단기간에 가시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번 조치는 미국이 추진 중인 의약품 관세 부과와 약가 인하 정책 등 기존 제약·바이오 규제 기조와 맞물려 글로벌 공급망과 가격 구조를 함께 흔들 변수로 평가된다. 의약품 생산과 바이오 서비스 전 과정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정책 신호가 겹치면서, 제조 거점과 서비스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다국적 제약사의 움직임이 가속될 가능성이 크다. 바이오경제연구센터는 내년을 글로벌 의약품 공급망과 기업 간 시장 경쟁 구도에 큰 파장을 낳는 시기로 전망했다.

 

국내 업계에서는 반사이익 기대감이 커지는 분위기다. 지금까지 미국 제약사와 연구기관 상당수가 비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CDMO와 유전체 서비스 기업을 활용해 왔지만, 생물보안법 시행으로 미국 연방 조달 영역은 물론 민간 부문에서도 중국 리스크 회피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에 따라 미국과 정치·안보 동맹을 공유하는 한국, 일본, 인도, 유럽 기업들이 대체 공급자로 부상할 여지가 커졌다는 평가다.

 

특히 CDMO를 포함한 생산기지 부문에서 한국 기업의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에스티팜, 롯데바이오로직스 등 국내 CDMO 기업들이 미국 발 수요를 흡수할 대표 후보로 꼽힌다. 이들 기업은 항체의약품과 바이오시밀러, 올리고뉴클레오티드 등 다양한 영역에서 대량 생산 경험과 글로벌 규제기관 인증을 확보해 왔다. 중국 비중을 줄이려는 글로벌 제약사 입장에서 규제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 생산기지를 선택할 유인이 커질 수 있다는 해석이다.

 

장비와 소재를 포함한 바이오 소부장 분야에서도 전략 변화가 예상된다. 세포배양 배지, 일회용 배양백, 정제용 수지, 분석 장비, NGS 관련 시약 등 주요 품목에서 중국산 의존도를 줄여야 하는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한국과 일본, 유럽 내 공급선을 재정비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도 국산 바이오 장비와 소재에 대한 품질과 생산능력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투자가 이어지고 있어, 생물보안법 시행이 기술 상용화 기회를 앞당길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경쟁은 한국에만 유리하게 흘러가지는 않을 전망이다. 인도는 이미 원료의약품과 제네릭 분야에서 강한 가격경쟁력을 갖춘 데다, 미국과의 전략 협력 확대 기조를 바탕으로 바이오 서비스 분야 진출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과 유럽 역시 고부가 바이오 장비와 특수 소재 분야에서 독자적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 리스크를 분산시키기 위해 여러 우호국에 조달선을 다변화하는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커, 한국 기업들이 수주 경쟁에서 기술력과 비용, 규제 대응 역량 모두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책 리스크 관리도 중요한 변수로 부상한다. 생물보안법은 미국 내에서의 연방 조달과 계약을 직접 겨냥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과의 기술 협력과 정보 공유 과정에서 다른 동맹국도 유사한 기준을 도입하도록 압박하는 ‘규제 수출’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바이오 데이터 이전, 유전체 정보 처리, 연구용 샘플 이동 과정에서 중국과의 협력이 제한될 수 있고, 제3국을 경유한 우회 거래에 대한 감시도 강화될 여지가 있다. 한국 기업이 중국 고객사와의 거래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미국 시장을 확대하려 할 때 규제 충돌을 어떻게 관리할지가 핵심 과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에서는 아직 생물보안법에 직접 대응하기 위한 별도 가이드라인이나 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관련 논의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추진 중인 바이오·반도체 동맹 구상과 연계해, 미국 시장을 겨냥한 GMP 인증 지원, 인허가 컨설팅, 연구 데이터 보안 기준 정비 등이 병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업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동시에 중국과의 연구 협력과 임상 네트워크를 급격히 축소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매출 공백과 비용 증가에 대비한 리스크 분산 전략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바이오경제연구센터는 생물보안법 시행이 단기간의 수주 기회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바이오 산업 구조를 재편하는 중장기 변곡점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센터 관계자는 글로벌 공급망이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양분되는 흐름 속에서 한국 기업이 선택할 전략적 위치가 향후 5년간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산업계는 생물보안법을 계기로 한국이 신뢰 기반 바이오 생산 허브로 도약할지, 규제 리스크와 고비용 구조에 발목이 잡힐지 주시하고 있다.

배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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