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국가책임” 거창·산청·함양 배상법 재발의…쟁점은 재정 부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책임을 둘러싼 국가와 국회가 다시 마주섰다. 경남 거창·산청·함양 지역에서 발생한 국군의 민간인 희생 사건과 관련해 피해자와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하도록 하는 특별법이 국회에 재발의되면서, 장기간 표류해 온 전쟁기 민간인 피해 문제 논의가 재점화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민홍철 의원은 8일 거창·산청·함양 사건관련자에 대한 배상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최근 국회에 대표 발의했다고 밝혔다. 법안은 1951년 국군이 공비 토벌을 명목으로 경상남도 거창군·산청군·함양군 일대 주민을 희생시킨 사건에 대해 국가의 법적 책임을 명문화하고, 구체적인 배상 절차를 마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민 의원 안은 거창·산청·함양 사건으로 사망하거나 다친 사람과 그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아울러 신체·정신적 피해를 치유하기 위한 트라우마 치유 사업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해 의료·심리 지원 등 후속 조치의 근거도 담았다.
배상 심사와 지원 정책 결정을 위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거창·산청·함양 사건관련자 배상심의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한 점도 특징이다. 위원회는 15명 이내 위원으로 구성되며, 관련 사실 조사와 피해 인정, 배상액 심의·의결을 담당하도록 설계됐다.
거창·산청·함양 사건 관련 국가배상 입법 시도는 이전 국회에서도 반복됐지만 처리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 내에선 해당 사건에 대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할 경우,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전반으로 국가배상 요구가 확산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재정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현재 국회에는 국민의힘 신성범 의원이 발의한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전부개정안도 계류 중이다. 두 법안은 같은 사건을 다루지만 접근 방식과 법적 용어 선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민 의원 법안이 불법적 행위에 대한 국가 책임을 전제로 한 배상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신 의원 법안은 적법한 공권력 행사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 보전 성격이 강한 보상 개념에 방점을 찍고 있다. 민·신 의원 법안의 병렬 계류는 한국전쟁기 국가폭력의 법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권의 이견을 반영한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신 의원 안은 국무총리 소속으로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 회복위원회를 설치하고, 사건 관련자에게 보상금과 의료지원금을 지급하는 근거를 담고 있다. 명예 회복과 함께 일정 수준의 금전적 지원을 통해 피해를 보전하되, 법적 책임을 둘러싼 논란은 최소화하려는 접근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민홍철 의원은 법안 제안 이유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과 유족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는 국가책임 완수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 국민 화합과 민주 발전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국가 책임 이행과 사회 통합을 핵심 목표로 내세운 셈이다.
거창·산청·함양 사건은 1951년 2월 7일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휴천면·유림면 일대,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이 공비 토벌 작전을 명분으로 다수의 주민을 희생시킨 사건이다. 이후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여러 차례의 조사와 입법 시도가 이어졌지만, 법적 배상에 이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관련 상임위원회가 두 법안을 어떻게 병합 심사하고 정리할지에 따라,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문제에 대한 국가의 책임 범위와 배상 기준이 설정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회는 향후 회기에서 법안 심사를 본격화할 경우 여야 간 재정 부담, 책임 범위 논쟁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