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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강경진압 유공자 재검토하라"…이재명, 박진경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 지시

송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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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강경 진압 책임 논란과 국가보훈 체계가 정면으로 맞붙었다. 무공훈장을 근거로 국가유공자 지위를 받은 고 박진경 대령을 둘러싼 논쟁이 이재명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제도 개편 논의로 번지는 양상이다.  

 

15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전날 국가보훈부에 고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한 인물을 둘러싼 도덕성 논란과, 무공훈장 보유자에 대한 자동 국가유공자 인정 제도를 함께 재점검하라는 취지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무공수훈자의 경우 심의·의결 없이 국가유공자로 자동으로 결정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거치지 않은 것을 한 번 더 심의하고 검토해보라는 취지"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논란이 있는 인물이 무공훈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별도 심의 없이 자동으로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는 현행 체계가 적합한지 다시 검토해보라는 대통령의 지시"라고 설명했다.  

 

현행 국가유공자법 6조 4항과 같은 법 시행령은 무공훈장을 받은 경우 보훈심사위원회의 심의·의결 절차를 생략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인 국가유공자는 보훈심사위원회의 심의와 의결을 거쳐야 하지만, 박진경 대령처럼 무공수훈을 받은 인물은 행정 절차상 자동으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될 수 있는 구조다.  

 

강유정 대변인은 다만 "박 대령 외에 모든 무공수훈자와 관련해 소급해서 하거나 전수 조사를 하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문제 제기가 제도 전반에 대한 일괄적인 소급 검증이 아니라, 사회적 논란을 야기한 개별 사례 중심으로 이뤄질 것임을 시사한 셈이다.  

 

고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제주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으로 부임해 4·3사건 당시 도민을 대상으로 한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제주 4·3 관련 단체와 유족들은 오랫동안 그를 양민 학살 책임자로 규정하며 국가 차원의 예우에 반대해왔다.  

 

앞서 지난 10월 서울보훈지청은 무공수훈을 근거로 박진경 대령 유족이 낸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승인했다. 이어 지난달 4일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의 직인이 찍힌 국가유공자증까지 유족에게 전달됐다. 등록과 증서 전달까지 일련의 행정 절차가 완료된 뒤 논란이 확산된 것이다.  

 

사안이 알려지면서 제주 지역과 4·3 유족회를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국가보훈부는 입장문을 통해 "제주 4·3과 관련한 논란이 있는 사안에 대해 신중한 검토가 이뤄지지 못한 점에 대해 희생자와 유가족 그리고 제주도민께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제도에 따른 처리였다는 설명과 별개로, 역사적 상처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권오을 장관도 지난 11일 직접 제주를 찾아 피해자 유족들을 만났다. 그는 "보훈부 장관으로서 희생자 유족들과 제주도민들께 정말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유공자 등록 취소 여부에 대해선 "절차를 모두 검토했지만, 그것은 입법을 통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현 제도에서는 등록을 취소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등록 취소 검토를 지시하면서 권오을 장관이 언급한 제도적 한계를 어떻게 넘을지가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관련 법령 개정이 필요하다는 보훈부 자성 기류와, 대통령실의 재검토 요구가 맞물리면서 국회 차원의 입법 논의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정치권에선 보훈 대상 선정 기준을 둘러싼 논쟁이 재점화될 가능성이 크다. 여권 일각에선 전투 공적과 인권 침해 논란을 함께 고려하는 새로운 심사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고, 야권에선 군사정부 시기 서훈과 유공자 지정의 전면 재정비를 요구해 왔다. 보수·진보 진영 모두 보훈은 존중해야 한다고 보면서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에 대한 국가 예우 기준을 두고 충돌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제주 4·3사건은 이미 여러 차례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와 사과, 희생자 명예회복 조치가 이뤄진 사안이다. 그럼에도 강경 진압 책임자로 지목돼 온 인물의 국가유공자 등록 문제를 계기로, 한국 사회가 과거사와 안보 공적, 인권과 보훈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지에 대한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대통령실의 지시에 따라 국가보훈부는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 가능성을 포함해 제도 개선 방안을 검토할 전망이다. 국회는 무공수훈자 자동 인정 규정을 손질하는 법 개정 여부를 둘러싸고 향후 회기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일 것으로 보이며, 정치권은 보훈 심사 기준을 놓고 정면 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송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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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박진경#국가보훈부